균열의 서곡 20

아침이 가장 얇을 때

by 은서의 숨겨진 책


금빛 균열이 번져가는 산속 저택, ‘문은 두 번 열리지 않는다’는 한 줄의 협박이 수연을 흔들고—공포의 밤은 끝나도 지훈의 손은 끝내 놓이지 않는다.


아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찾아왔다.

어젯밤의 정전도, 깨진 창도, 문을 흔들던 힘도, 전부 꿈의 잔상으로 밀려나야 할 것처럼—산은 조용히 햇빛을 들이밀었다. 잔디 끝에는 밤새 맺힌 물방울이 빛을 품고 있었고, 공기는 맑아서 잔인했다. 맑은 공기는 거짓말을 싫어하는데, 나는 지금 가장 큰 거짓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커튼을 젖히자 유리창 한쪽의 금빛 균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빛이 닿자 균열은 금사처럼 가느다랗게 반짝였고, 그 반짝임은 어젯밤보다 넓었다. 넓어졌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느낌은, 어떤 날엔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나를 붙든다.


손바닥을 펼쳤다.

유리 조각이 스쳐 지나간 얕은 붉은 자국이 밤새 굳어 있었다. 상처라기엔 너무 사소하고, 증거라기엔 너무 선명한 흔적. 나는 그 자국을 엄지로 문질렀다. 따끔함이 깨어났다. 마치 어젯밤의 장면이 피부에 저장되어 있었다는 듯이.


문득, 계단에서 내 손을 감싸던 지훈의 손이 떠올랐다.

“놓지는 않을게요.”

그 말이 아직도 손가락 사이에 남아 있었다. 손이라는 것은, 잡혔던 형태를 오래 기억한다. 그러니 내 손이 지금 불편한 건, 상처 때문만이 아니라 어젯밤의 약속 때문이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복도에서 발걸음이 조심스럽게 가까워지다가 멈췄다. 노크가 오지 않는 순간의 정적. 사람은 그때 더 크게 긴장한다. 결국,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수연 씨, 일어났어요?”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문을 열었다.

지훈은 어제보다 덜 지친 얼굴이었다. 밝은 빛 아래서 보니, 밤에 보이지 않던 피로가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났다. 눈가 아래 얇은 그늘, 입술의 건조함.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잔 사람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진실해 보인다.


“관리인 아저씨는요?”


“아까 마을 내려갔어요. 파출소랑 같이 산길 올라올 거래요. 흔적 확인한다고.”


지훈은 내 방 안쪽을 힐끗 보고, 내 손바닥을 봤다.

그 시선이 머문 자리가 정확해서 숨이 막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뒤로 감췄다.


“손…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냥 조금 긁힌 거예요.”


“괜찮은 건, 어젯밤 다들 많이 말했죠.”


그는 웃으려다 멈췄다.

농담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슬리퍼를 끌며 복도로 나왔다. 복도 끝, 내 방 맞은편 벽에도 금빛 균열이 아주 얇게 번져 있는 게 보였다. 처음엔 장식의 반사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갈수록 균열은 “선”이 아니라 “결” 같았다. 표면이 갈라진 결. 누군가 얇은 칼끝으로 밤 사이 긁어놓은 결.


“이 집… 어젯밤 이후로 더 조용해졌죠?”


내가 말하자 지훈이 잠시 멈춰 섰다.


“조용한데… 숨을 쉬는 것 같아요.”


내가 어젯밤 붙였던 제목이 떠올랐다. 문이 숨을 쉬는 밤.

지훈은 그 말을 한 번 되뇌듯 입술을 움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이 더 무섭기도 해요. 밤은 적어도 어둡다는 핑계가 있는데, 아침은…”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니까요.”


내가 말을 이어받자 지훈은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은 가볍지 않았다. 가벼운 척하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우리는 1층으로 내려갔다.

거실 한쪽에는 어젯밤 막아둔 판자가 그대로 붙어 있었고, 그 틈 사이로 아직 차가운 공기가 조금씩 스며들었다. 관리인이 임시로 커튼을 겹쳐 걸어둔 탓에 거실은 낮인데도 낡은 영화관처럼 어두웠다. 어둠이 낮을 흉내 내는 공간.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오히려 안심했다. 밝으면 더 선명해질 것들이 있었다.


주방에는 커피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지훈이 물을 끓이고 있었다. 그는 어젯밤 내내 손전등을 들던 손으로, 이제 주전자를 잡았다. 같은 손이 다른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착각을 준다.


“현우 씨한테… 연락했어요?”


지훈이 물을 붓는 소리 사이로 조용히 물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못 했다.


“아직요.”


“할 거예요?”


“해야죠.”


내 입은 ‘해야죠’라고 말했지만, 내 손은 휴대전화를 잡지 않았다.

내 안의 어떤 부분은 연락을 늦추고 싶어 했다. 연락을 늦추면, 어젯밤의 “같은 편”이 조금 더 오래 유지될 테니까. 그리고 그 유지가 내게 얼마나 위험한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훈이 커피잔을 내 앞에 놓았다.

손등이 아주 잠깐 내 손등에 닿았다. 닿았다는 사실을, 우리 둘은 동시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누구도 손을 급하게 빼지 않았다. 밤이 아니라 아침이었기 때문에, 이 접촉은 더 위험했다. 밤에는 공포가 핑계가 되지만, 아침에는 핑계가 희미해진다.


“전화… 내가 옆에 있어도 돼요?”


그가 물었다.

“옆에”라는 단어는, 도움처럼 들리지만 방향이 많다. 나는 커피잔을 한 번 더 쥐었다가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현우의 이름을 누르기 전, 나는 내 손바닥의 상처를 다시 보았다. 이 작은 상처 때문에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이 달라진다. 상처는 몸에만 생기는 게 아니었다.


통화 연결음이 두 번 울리고, 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연아.”


그 목소리는 도시의 공기처럼 평평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목소리. 그 무지가 갑자기 죄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 전기 잠깐 나갔어.”


나는 말을 골라냈다.

너무 정확하면 의심을 부르고, 너무 흐리면 거짓말이 된다. 그래서 나는 가장 흔한 사건만 골랐다. 정전. 마을도 같이 꺼졌다는 이야기. 발전기.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말.


“그래? 다행이다. 산은 그런 게 가끔 있지.”


현우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그 예상이 나를 아프게 했다. 그는 늘 “정확”했고, 그 정확함은 내게서 상황을 빼앗아갔다. 내가 무서워하기 전에 이미 설명해버리고, 내가 불안해하기 전에 이미 대비해버린다. 어젯밤의 나는 그런 정확함이 필요했다. 그런데 어젯밤 내 옆에 있던 사람은 현우가 아니었다.


“창문이… 조금 깨졌어.”


나는 결국 두 번째 사실을 덧붙였다.

지훈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숨을 삼키는 기색.


“뭐?”


현우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큰 건 아니고, 작은 창문… 바람에 뭔가…”


나는 끝을 흐렸다. ‘돌’이라는 단어를 지금 꺼내면, 현우는 즉시 “경찰 불러”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어젯밤의 모든 장면이 기록으로 변한다. 기록은, 사람의 숨을 바짝 조이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조임이 두려웠다.


“관리인이 조치했어. 판자로 막고.”


“너는 괜찮고? 다친 데 없어?”


“응, 괜찮아.”


나는 마지막 ‘응’에서 아주 작게 멈칫했다.

그 틈이 내 목소리에 들어갔을까, 현우의 귀에 들어갔을까. 지훈의 귀에는 분명히 들어갔다.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침묵이 오히려 큰 소리처럼 들렸다.


“수연아.”


현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습관적인 걱정이 섞여 있었다. 그 걱정이 진짜라는 걸 나는 안다. 그런데도 그 진짜가, 지금 내게는 “늦은”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밖에 혼자 나가지 마. 관리인하고 같이 다녀. 필요하면 내가 사람 보내.”


“사람…?”


“응. 산은… 이상해. 너도 알잖아.”


그가 ‘이상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내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현우는 늘 ‘안전’ ‘조심’ 같은 말만 골라 쓰는 사람인데, 오늘은 ‘이상해’라고 했다. 그 말은, 그도 어딘가 불길함을 느낀다는 뜻 같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알겠어.”


나는 짧게 답했다.

그 짧음이 내 마음의 길이를 숨겨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통화를 끊자마자, 지훈이 조용히 말했다.


“돌… 던졌다는 얘긴 안 했네요.”


나는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뜨거움이 목을 지나갔다. 뜨거움이 지나가면, 남는 건 허전함이다.


“말하면 바로 올라올 것 같아서.”


“올라오면… 싫어요?”


그 질문은 너무 곧았다.

나는 대답 대신 창문 쪽 판자를 바라봤다.


“싫다기보단… 복잡해져.”


“복잡해지는 게 싫은 거죠.”


지훈은 내 대신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 결론이 무서웠다. 내가 내 입으로 하지 않은 말을, 누군가가 대신 정확히 말해주는 순간, 그것은 사실이 되어버린다.


그때, 현관 쪽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관리인의 목소리, 그리고 낯선 남자의 목소리 하나. 파출소에서 온 사람이었다.


우리는 거실로 나갔다.

젊은 경찰이 아니라, 중년의 순경이었다. 산 아래 마을에서 오래 근무한 사람의 얼굴. 그는 이 집을 한 번 훑어보고, 깨진 창을 보고, 임시로 막아둔 판자를 보고, 마당 쪽을 봤다. 그의 시선은 “익숙한 사건”을 처리하는 눈이었다. 그래서 더 불길했다. 익숙하다는 건, 자주 있다는 뜻이니까.


“어젯밤 몇 시쯤이었습니까?”


관리인이 대답했다.

정전 시간, 소리, CCTV 화면, 돌의 위치. 나는 그들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도, 내 머릿속에서는 다른 시간을 세고 있었다. 지훈이 내 손을 잡았던 순간, 내 몸이 넘어질 때 그의 손이 허리를 받쳤던 순간, “오늘만”이라고 말하던 순간. 그 시간들은 사건 기록으로는 남지 않는다. 하지만 내 심장에는 기록된다.


순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산길에 차량 흔적이 하나 있었는데, 어젯밤 비가 와서 애매합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일도 아니고… 요즘 산 위쪽으로 올라왔다 내려가는 차가 가끔 있어요.”


“누가요?”


관리인이 물었다.


“사람이요. 낚시하러, 사진 찍으러, 별 보러… 핑계는 많습니다. 근데 새벽에 와서 창을 깨는 건 다른 얘기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우리를 번갈아 봤다.


“일단은요, 오늘부터 며칠은 밤에 불 다 켜두세요. 움직일 땐 두 분 같이 움직이시고. 그리고… 혹시라도, 혹시라도 이상한 걸 보거나 들으면, ‘설마’ 하지 마시고 바로 연락 주십시오. 산은 설마가 제일 위험해요.”


그 말이 어젯밤 내게 필요했던 말 같아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현우의 말은 늘 조언이었고, 이 순경의 말은 경고였다. 그리고 지훈의 말은… 약속이었다.


순경이 돌아가고, 관리인은 마당 쪽을 다시 점검하러 나갔다.

지훈은 판자 고정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했다. 못이 제대로 박혀 있는지, 틈이 벌어지지 않았는지. 그는 이런 일을 “능숙하게” 했다. 그 능숙함이, 그가 이 집에 오래 있었던 사람처럼 느껴지게 했다. 나는 그의 과거를 알고 있었지만, 이 집에서의 그는 새롭게 보였다. 과거의 지훈이 아니라, 지금 이 공간에서 살아 움직이는 지훈.


“수연 씨.”


그가 나를 불렀다.


“잠깐 밖으로 나갈래요?”


“밖?”


“마을까지는 아니고, 저택 울타리 쪽만. 순경 말대로 밤에 불 켤 거면, 조명 상태랑 전선 연결 확인해야 하잖아요.”


그 말은 합리적이었다.

합리적인 말은 내 거절을 쉽게 무너뜨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마당으로 나갔다.

어젯밤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낮에 드러났다. 잔디 위에 발자국 같은 흔적이 있었다. 완전한 발자국은 아니었다. 비에 쓸려 흐릿해진, 뭔가가 지나갔던 결. 울타리 쪽 나뭇가지가 몇 개 꺾여 있었다. 새가 부딪혔다고 하기엔 너무 낮은 위치. 사람이 지나갔다고 하기엔 너무 가늘고, 너무 지저분한 꺾임. 나는 그 애매함이 싫었다. 애매함은 상상력을 키운다. 상상력은 공포를 번식시킨다.


지훈이 울타리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여기… 누가 손댄 것 같죠?”


그는 손전등 대신 낮은 빛에서 울타리의 금속을 만졌다.

손끝이 움직이는 선을 따라가자, 금속 표면에 아주 미세한 긁힘이 보였다. 누군가 철사나 날카로운 도구로 긁은 흔적. 나는 숨을 멈췄다.


“어젯밤… 그 그림자.”


내가 중얼거리자 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그건, 사람일까요?”


“사람이면 더 무섭고, 사람이 아니면… 더 무서워요..”


내 말이 어쩐지 우스웠는지, 지훈이 짧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에도 긴장이 있었다. 그는 내 옆에 더 가까이 섰다. 바람이 불자, 그의 코트 자락이 내 팔에 닿았다. 팔의 피부가 즉시 반응했다. 이런 반응은 내가 원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내 몸이 먼저 배워버린 것이다.


“수연 씨.”


지훈이 낮게 말했다.


“혹시… 어젯밤 꿈 얘기, 기억나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손이… 문손잡이를 돌리던 꿈.”


“그 손이 누구 것도 아니었다고 했죠.”


그는 내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이 오싹하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했다. 누군가가 내 말을 기억해주는 건, 그 자체로 관계가 된다. 관계는 습관처럼 스며든다.


“그런데요.”


지훈이 울타리 긁힌 자국을 보며 말했다.


“혹시 그 손이, 사람 손이 아니라… ‘이 집’의 손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말에 나는 몸이 굳었다.

‘집의 손’이라는 표현은 너무 시적이어서 더 무서웠다. 손이 없는 것이 손처럼 행동할 때, 인간은 가장 공포를 느낀다.


“그럼… 이 집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건가.”


지훈이 내 말의 끝을 받아 적듯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할 때, 나는 어젯밤 관리인의 농담을 떠올렸다. “이 집이 우릴 붙잡고 있는 건지.” 아무도 웃지 않았던 농담. 농담이 아닌 말.


우리는 울타리 끝까지 걸어갔다.

울타리 바깥 산길 쪽으로 시야가 열렸다. 낮이라 그런지 길은 평범해 보였다. 나뭇잎이 흔들리고, 멀리 마을 지붕이 보이고, 하늘은 겨울답게 높았다. 평범함이 더 기괴했다. 어젯밤 이 평범한 길로 누군가 올라왔을까. 누가, 어떤 얼굴로, 어떤 숨을 쉬며.


그때, 내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현우였다. 다시. 나는 잠깐 멈칫했다. 지훈이 내 얼굴을 봤다.


“받아요.”


그는 짧게 말했다.

그 말은 배려 같았지만, 그 안에 아주 얇은 질투가 섞였는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질투인지, 긴장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감정은 더 위험하다.


전화를 받았다.


“수연아. 방금 생각났는데.”


현우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조금 급했다.


“너 요즘… 창가에 오래 서 있지 마.”


“왜?”


“그 집 창… 금 간 거 있잖아.”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현우는 금빛 균열을 알고 있었다. 내가 사진으로 보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현우는 그냥 “예쁘네”라고만 했는데, 지금은 ‘금 간 거’라고 했다. 그는 예쁜 걸 예쁘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예쁘다고 말하지 않았다.


“유리 약해지면, 바람 불 때 더 위험해. 그리고… 괜히, 그거 보고 있으면 마음이 이상해진다.”


마음이 이상해진다.

현우가 그런 말을 하는 건 드물었다. 그는 늘 안전을 물리적으로만 설명하는 사람인데, 오늘은 마음을 말했다. 나는 목 뒤가 서늘해졌다. 마치 현우가 내 마음의 균열을 어딘가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알겠어.”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오늘… 지훈씨랑은.”


그 이름이 나오자, 내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지훈은 내 옆에서 고개를 약간 숙였다. 듣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 목소리의 온도가 바뀌는 걸, 그는 느꼈을 것이다.


“지훈씨랑은 뭐?”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물어서, 내 스스로가 더 수상해졌다.


현우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너무 가까이 있지 마.”


그 말은 조언 같지 않았다. 경고였다.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왜?”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 ‘왜’는 내 안의 죄책감을 스스로 끌어올리는 질문이었다. 현우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이유를 말하지 않는 방식은, 알면서도 묻지 않는 방식과 닮아 있었다.


“알겠어.”


나는 다시 말했다.

이 ‘알겠어’는, 내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현우에게 주는 소리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지훈도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울타리 끝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래요?”


“별말 아니에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내 안에서 뭔가 ‘딱’ 하고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어젯밤 문을 잠글 때 들렸던 그 소리. 이제는 내 마음의 문을 잠그는 소리였다.


지훈이 나를 봤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개 끄덕임이 나를 더 무섭게 했다. 그는 내 거짓말을 알아차렸을까. 알아차렸는데도 넘어가주는 걸까. 넘어가주는 건, 관계의 문을 더 넓히는 행위다. 우리는 지금, 말하지 않음으로 서로를 안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날 오후, 관리인은 전선과 조명을 다시 점검했다.

지훈은 마당 조명 타이머를 조정했고, 나는 부엌에서 구급상자를 찾아 내 손바닥을 제대로 소독했다. 상처가 작아도, 상처는 관리하지 않으면 벌어진다. 나는 손바닥에 밴드를 붙이며 생각했다. 내 마음도 밴드를 붙이면 낫는 걸까. 아니면 밴드는 상처를 숨길 뿐, 속에서는 더 곪는 걸까.


밴드를 붙이자, 손바닥의 감각이 달라졌다.

피부가 직접 닿지 않으니 오히려 손끝이 예민해졌다. 이 얇은 가림막 하나가 나를 더 민감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지금 내 상황과 닮아 있었다. 나는 현우에게 많은 걸 숨기고 있는 게 아니라, 아주 얇은 것 하나만 숨겼다. 그런데 그 얇은 게 내 감각을 전부 바꾸고 있었다.


저녁이 다가올수록, 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낮의 소음이 걷히자, 어젯밤의 기억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관리인은 1층에서 CCTV 화면을 한 번씩 확인하며 시간을 보냈고, 나는 거실 커튼을 다시 정리했다. 지훈은 창문 임시 보강을 한 번 더 했다. 못이 느슨해지지 않았는지, 판자가 흔들리지 않는지.


“수연 씨.”


지훈이 못을 확인하다가 말했다.


“오늘 밤도… 불 켜고 있을 거죠?”


“네.”


“혹시라도… 무서우면.”


그는 말을 끊었다.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아도, 나는 그 다음을 알 것 같았다. “나 불러요.” “혼자 있지 마요.” “문 열기 전에 확인해요.” 어젯밤 우리가 만든 규칙들. 규칙은 안전을 주지만, 동시에 우리 둘을 더 자주 만나게 만든다.


“무서우면…?”


내가 일부러 되묻자, 지훈이 나를 바라봤다.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해요. 그게 제일 빨라요.”


그 말은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나는 커튼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부드러움이 무섭다. 부드러움은 사람을 안쪽으로 무너뜨린다. 특히 내가 이미 공허한 사람이라면. 작은 온기 하나에, 나는 과장되게 끌려가버릴 수 있다.


밤이 되었고, 조명은 밝게 켜졌다.

마당 조명이 켜진 상태에서 집은 더 노출되어 보였다. 어둠 속에서 숨을 수 없었다. 노출은 안전 같지만, 동시에 표적이 되는 느낌을 준다. 나는 커튼 틈을 살짝 열고 밖을 보았다. 나뭇가지가 흔들렸고, 산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 보이지 않음이 어젯밤보다 더 무서웠다.


“창가 오래 서 있지 마.”


현우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커튼을 닫으려다 멈췄다. 커튼을 닫으면, 나는 더 안전해질까. 아니면 더 고립될까. 고립은 공포를 키운다. 그러면 나는 다시 지훈을 찾게 된다. 내가 무엇을 선택해도, 결국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때, CCTV 모니터에서 삐— 하는 짧은 소리가 났다.

관리인이 바로 자세를 고쳤다. 나도, 지훈도 동시에 거실로 뛰어갔다. 화면 한쪽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어젯밤처럼 전부가 동시에 죽지는 않았지만, 4분할 화면 중 하나가 잠깐 하얗게 번졌다.


관리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또야.”


지훈이 숨을 삼켰다.


“어제랑 비슷해요?”


“어제는 정전이랑 같이 왔는데… 오늘은 전기 멀쩡한데.”


흰 번짐은 금방 사라졌다.

하지만 문제는, 사라진 뒤에 화면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카메라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그런데 카메라는 울타리 기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바람 아니에요?”


내가 묻자, 관리인이 고개를 저었다.


“바람이면 나뭇잎도 같이 흔들려야죠. 근데 저건… 화면만 흔들려.”


그 말이 끝나자, 화면 오른쪽 아래—울타리 쪽 카메라에 뭔가가 스쳤다.

검은 것. 사람의 실루엣처럼 보였다가, 나무 그림자처럼 흩어졌다.


나는 손이 차가워졌다.

지훈이 내 옆에서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들이마신 숨이, 내 귓가까지 들릴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관리인이 리모컨으로 화면을 확대했다.

확대한 순간, 우리는 동시에 봤다.


울타리 기둥 아래쪽에—금속에—무언가 반짝이는 게 있었다. 낮에 보았던 그 긁힘 자국. 그 자국이 조명 아래서 더 선명하게 빛났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빛이 비칠 때 보이게 해놓은 표시처럼.


“이거…”


관리인이 말했다.


“누가 낮에 와서 해놓은 거 아닌가?”


낮에.

그 단어가 나를 얼렸다. 낮에 누가 왔다는 건, 어젯밤의 일회성 위협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누군가가 이 집을 “계속” 보고 있다는 뜻이다. 계속 본다는 건, 타이밍을 고른다는 뜻이고, 타이밍을 고른다는 건, 집 안의 움직임까지 계산한다는 뜻이다.


지훈이 낮게 말했다.


“지금 나가서 확인하죠.”


“지금요?”


내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지금이 더 안전해요. 화면이 흔들리는 동안, 저게 진짜인지 확인해야 해요. 그리고… 밤에 흔적 남기면 더 찾기 쉬워요.”


그 말은 맞았다.

맞는 말이 또 나를 움직였다. 나는 싫다고 말하지 못했다. ‘같이’라는 단어가 이미 내 몸에 습관이 되어버렸다.


관리인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나가요. 나는 여기서 화면 보고 있을 테니.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소리쳐요.”


우리는 외투를 챙겼다.

지훈은 손전등을 들었고, 나는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쥐었다. 현관문을 열기 전, 어젯밤처럼 숨을 고르는 순간이 왔다. 문을 열면, 바깥이 들어온다. 산의 냄새, 산의 소리, 산의 그림자. 그리고 어쩌면, 산 아래의 눈동자.


“수연 씨.”


지훈이 아주 낮게 말했다.


“나만 보지 말고, 소리도 같이 들어요.”


“소리…?”


“사람은 무서우면, 눈으로만 확인하려고 해요. 근데 눈은 속기 쉽거든요. 소리가 더 정직해요.”

그 말은 어젯밤 계단에서 그가 했던 말과 닮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찬 공기가 한 번에 얼굴을 때렸다.

공기는 어젯밤보다 차가웠다. 산의 밤공기는 낮보다 더 무겁고, 더 날카롭다. 우리는 마당을 가로질러 울타리 쪽으로 걸었다. 조명 아래서 잔디는 밝았지만, 그 밝음은 어둠을 더 짙게 만들었다. 빛이 있는 곳의 그림자는 더 선명하니까.


울타리 기둥 아래에 다다랐을 때, 지훈이 손전등을 비췄다.

낮에 보았던 긁힘 자국 옆에—작은 종이 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누군가 철사 틈에 얇게 꽂아둔 종이. 조명 아래서 종이는 더 하얗게 보였다.

지훈이 손전등을 내 쪽으로 돌렸다.


“수연 씨, 손 대지 말고. 내가 볼게요.”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종이를 조심스럽게 뺐다.

종이는 접혀 있었다. 접힌 선이 정확했다. 마치 메시지를 남겨본 적이 많은 사람처럼.


지훈이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표정이 아주 짧게 굳었다.


“뭐에요…?”


내가 묻자, 지훈은 종이를 내게 보여주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 반사적 움직임이 너무 빠르고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더 확실했다. 나에게 보여주면 안 되는 내용이라는 뜻이다.


“뭐라고 써 있어요?”


내 목소리가 올라갔다.

공포 때문인지, 다른 감정 때문인지 모르겠다. 지훈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닌데 왜 숨겨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바람이 울타리를 한 번 흔들었다.

금속이 떨리는 소리. 그 떨림이 내 신경을 더 날카롭게 했다.


지훈이 숨을 한 번 고르고, 낮게 말했다.


“수연 씨가 보면… 더 무서워질까 봐.”


“무서워질 권리는 나한테 있어요”


내가 말하자, 지훈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눈빛은, 어젯밤 ‘오늘만’이라고 말하던 눈빛과 비슷했다. 경계와 욕망이 동시에 떠 있는 눈빛.


“집 안으로 들어가요.”


그가 말했다.


“여기서 말하면, 바깥이 듣는 것 같아요.”


그 말이 내 등을 밀었다.

우리는 다시 현관으로 빠르게 걸었다.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걸자, 숨이 조금 돌아왔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다른 숨이 더 거칠어졌다. ‘종이’라는 얇은 물체 하나가, 내 마음을 이렇게 흔들 수 있다니.


거실로 들어오자, 관리인이 우리를 보며 물었다.


“뭐 있었어요?”


지훈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짧게 말했다.


“표식이 하나 더 생겼어요. 종이도 끼워져 있었고.”


“종이?”


관리인이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써 있던데요?”


지훈은 잠깐 나를 봤다.

그 시선이 아주 짧았는데도, 나는 그 안에서 ‘선택’을 봤다. 보여줄지, 숨길지. 그리고 그 선택이 나를 포함하는지, 배제하는지.


“협박 비슷한 거요.”


지훈이 관리인에게 말했다.


나는 숨이 턱 막혔다.

협박. 그 단어는 아까까지 내게 없던 단어였다. 어젯밤은 위협이었고, 오늘은 협박이 되었다. 위협은 자연재해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협박은 “의지”가 있다. 의지가 있다는 건, 나를 겨냥한다는 뜻이다.


“나도 봐야겠어요.”


관리인이 말했다.


“경찰에 보여줘야지.”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바로.”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지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말 없이. 아주 작게. 지훈이 나를 따라 부엌 쪽으로 한 발 옮겼다. 관리인에게서 시야가 살짝 떨어지는 곳.


“나한테는 왜 안 보여줘요”


나는 낮게 물었다.

낮게 물어도 내 목소리는 떨렸다.


지훈이 내 앞에서 멈췄다.


“수연 씨.”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어젯밤보다 더 가까웠다.


“보여주면, 오늘 밤부터 수연 씨는 잠을 못 잘 거예요.”


“그럼 지금도 못 자요.”


“지금은… 내가 옆에 있잖아요.”


그 말이 공포보다 먼저 내 심장을 건드렸다.

나는 화가 나야 했다. 그런데 화 대신, 이상한 안도감이 올라왔다. 그 안도감이 더 무서웠다. 어젯밤 같은 편이었던 사람에게서, 나는 ‘편’이라는 감정을 더 원하고 있었다.


“그 말… 함부로 하지 마요”


나는 겨우 말했다.


지훈은 아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알면서 왜 해요.”


내가 묻자,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말이 없는 동안, 부엌의 전등이 아주 미세하게 깜빡였다. 전등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그 순간의 깜빡임이 마치 누군가 대화의 틈을 들여다본 것 같았다.


지훈이 낮게 말했다.


“어젯밤 이후로… 나는 이미 함부로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고백은 섬뜩할 정도로 솔직했다.

솔직함은 사람을 벗기고, 벗겨진 사람은 더 쉽게 붙잡힌다. 나는 그 앞에서 한 발 물러서려 했지만, 부엌의 좁은 공간이 내 등을 막았다.


“그 종이… 뭐라고 써 있어요”


나는 다시 물었다.

지훈은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가, 마침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종이를 펼치지 않고, 접힌 채 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밴드가 붙어 있는 손바닥 위로 종이가 닿았다. 얇은 종이가 내 상처에 닿자, 따끔함이 다시 살아났다.


“직접 봐요.”


그가 말했다.


나는 종이를 펼쳤다.

손가락이 떨렸다. 접힌 선이 벌어지며 글자가 드러났다.


짧은 문장이었다.

너무 짧아서, 더 무서웠다.


‘문은 두 번 열리지 않는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지 못했다.

문은 두 번 열리지 않는다. 그 말은 어젯밤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두 번’이라는 말은, 다음에는 열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협박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내 손에서 종이가 떨어질 뻔했다.

지훈이 내 손목을 잡았다. 어젯밤과 같은 위치. 같은 힘. 같은 온도. 그런데 이번에는, 넘어지지 않았는데도 잡았다. 필요가 아니라 습관처럼.


나는 지훈을 바라봤다.


“이거… 나한테 하는 말일까요?”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내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조금 더 줬다. 그 힘은 ‘놓지 않겠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뜻이 무서웠다. 바깥의 위협보다, 안쪽에서 만들어지는 약속이 더 무섭다.


그때, 거실에서 관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 다, 여기로 와봐!”


우리는 동시에 거실로 뛰어갔다.

CCTV 화면이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아까보다 심했다. 화면 한쪽이 하얗게 번졌다가, 어둠으로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그리고 그 흔들림 사이로—마당 카메라 화면에—아주 잠깐, 어떤 것이 서 있었다.


울타리 안쪽.

조명 아래.

사람처럼, 서 있었다.


하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빛이 얼굴 자리를 먹어치운 것처럼 하얗게 번졌다. 어젯밤 화면 속 흰 점의 눈동자처럼, 이번에도 하얀 것이 얼굴을 대신했다.


관리인이 욕을 내뱉었다.


“미친…”


지훈이 내 앞을 가로막듯 섰다.

그는 화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아저씨, 지금 문 잠갔죠?”


“잠갔지요!”


“그럼 창문은?”


“다 잠갔어요. 깨진 데는 판자랑 커튼, 두 겹으로 했고.”


“좋아요.”


지훈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럼 이건… 들어오려는 게 아니라, 보게 하려는 거예요.”


보게 하려는 거.

나는 종이에 적힌 문장을 떠올렸다. ‘문은 두 번 열리지 않는다.’ 그 말은 단지 위협이 아니라,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장치였다. 공포는 사람을 움직인다. 공포는 사람을 서로에게 붙게 만든다. 붙게 만들면, 그 붙음 자체가 균열이 된다.


나는 내 심장이 그 논리를 이해하는 게 더 끔찍했다.

이 집은, 산은, 혹은 누군가는—상황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어젯밤은 우연이었을지 몰라도, 오늘은 우연이 아니었다.


지훈이 내 옆으로 아주 낮게 말했다.


“수연 씨.”


“네.”


“오늘은… 문 열지 마요.”


그 말은 바깥의 문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알아차렸다. 지훈도 알아차렸을까. 그는 내 눈을 잠깐 봤고, 그 눈빛은 어제보다 더 짙었다.


관리인이 파출소에 다시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신호는 또 불안정했다.

전화가 연결되었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화면 속 실루엣은 사라졌고, 마당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마당이 더 무서웠다. 방금 전까지 “있던 것”이 “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날 밤, 우리는 다시 1층에서 시간을 보냈다.

관리인은 소파에 앉아 모니터를 주시했고, 나는 담요를 무릎에 덮고 앉았다. 지훈은 창문과 문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확인이라는 행위는 불안을 잠깐 낮추지만, 동시에 불안을 지속시키는 의식이 되기도 한다. 확인을 멈추면 큰일 날 것 같아, 계속 확인하게 된다.


시간이 자정 가까이 갔을 때, 관리인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나는 커피를 더 끓이려다가, 손바닥이 따끔거려서 멈췄다. 밴드 아래의 상처가 나를 붙잡았다. 작은 상처가 큰 경고처럼 느껴졌다.

지훈이 내 옆에 앉았다.

그는 말없이 담요 끝을 내 무릎 쪽으로 조금 더 끌어당겨 정리해줬다. 현우가 했던 행동이 떠올랐다. 밤중에 담요를 덮어주던 현우. 그 따뜻함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죄책감에 숨이 막혔다. 그런데 동시에, 지금 지훈의 손길이 더 생생했다. 생생함은 죄책감을 밀어낸다. 죄책감은 과거의 감정이고, 생생함은 현재의 감정이다.


“수연 씨.”


지훈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현우 씨가 뭐랬어요. 나랑 가까이 있지 말라고 했죠.”

나는 화들짝 놀라 그를 봤다.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 그는 맞혔다. 아니, 내 얼굴에서 읽었다. 그의 눈은 어젯밤부터 내 표정을 너무 잘 읽고 있었다.


“맞아요”


나는 결국 인정했다.

부정하면 더 깊은 거짓말이 된다. 나는 거짓말의 양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았다.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해요.”


그 말이 의외였다.

나는 ‘왜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묻는 순간 그 이유가 내게 칼처럼 돌아올 것 같았다.


“그래도…”


지훈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도, 우리는 같은 편이었죠.”


나는 답하지 못했다.

같은 편이라는 말은 어젯밤엔 안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종이와 CCTV와 현우의 경고가 겹쳐진 오늘은—그 말이 전부를 결정해버리는 주문처럼 들렸다.


지훈이 손을 내밀었다.

어젯밤 계단에서 내밀었던 그 손. 이번에는 계단도, 어둠도, 낙상도 필요 없었다. 그럼에도 손은 내 앞에 있었다.


“잡으라는 건가요?”


내가 낮게 묻자, 지훈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손이 필요해요. 수연 씨도.”


그 말은 정직해서 더 위험했다.

나는 내 손바닥의 밴드를 바라봤다. 밴드는 얇고, 종이는 얇고, 우리 사이의 선도 얇다. 얇은 것들이 모이면 쉽게 찢어진다.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지훈의 손이 내 손을 감쌌다.

이번엔 조심스럽지 않았다. 대신 정확했다. 쥐지 않으면서도 놓지 않는 방식. 인간이 가장 빨리 익숙해지는 온도.


그 순간, 관리인이 소파에서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처럼 말했다.


“문… 잠가…”


그 말이 우리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나는 손을 빼려 했지만, 지훈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내 손을 잡은 채, 아주 낮게 속삭였다.


“수연 씨. 이건… 지금만이에요.”


“어제도 그랬잖아요.”


내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지훈은 아주 잠깐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숨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말했다.


“내가 계속 ‘지금만’이라고 말해야, 내가 아직 인간인 것 같거든요.”


그 말은 고백이었다.

나는 그 고백이, 어젯밤 ‘놓지는 않을게요’보다 더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인간인 척한다는 건, 이미 인간의 선을 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선이 무섭다고 느끼면서도, 그 선을 더 가까이 보고 싶었다.


창밖에서 바람이 한 번 크게 불었다.

판자가 미세하게 울었다.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두드린 것처럼.


툭.


그 소리가 어젯밤의 시작과 닮아 있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지훈이 내 손을 더 꽉 잡았다.


“들었어요?”


그가 속삭였다.


“네”


“이번엔… 문이 아니라 창이 숨 쉬네요.”


그 말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집이 숨 쉬는 밤. 문이 숨 쉬는 밤. 그리고—내 마음이 숨을 쉬는 밤. 숨은 살아있다는 뜻이다. 나는 지훈 옆에서, 공포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 살아있음이 내게는 너무 달콤했다.


내가 가장 무서웠던 건, 바깥의 실루엣이 아니었다.

‘문은 두 번 열리지 않는다’는 협박도 아니었다.

현우의 경고도 아니었다.


내가 가장 무서웠던 건—

이 공포가 지나가도, 내 손이 지훈의 손을 기억할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아무런 공포도 없이 맑은 아침이 와도, 나는 그 손을 다시 찾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내 손을 뺄 수 있었다.

지금은 뺄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빼지 않았다.


그게 오늘 밤의 결론이었다.

벽의 균열은 금빛으로 넓어지고, 창의 균열은 판자로 막을 수 있었지만,

내 마음의 균열은—막을 판자도, 못도, 커튼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집이 원하는 건 문을 여는 일이 아니라,

내가 “같은 편”이라는 말을 더 이상 부정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그 순간이 오면,

문은 정말로 두 번 열리지 않을 것이다.


밖에서.

안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나는 지훈의 손을 느낀 채, 아주 작게 속삭였다.


“오늘만.”


그 말은 약속이 아니라, 변명이었다.

변명은 늘 다음을 준비한다.


어둠 속에서, 문은 조용히 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도—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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