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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mena May 20. 2022

스웨덴어, 꼭 배워야 할까?

정착형 방랑자의 '적당한' 균형 찾기

스웨덴어에서 가장 유명한 단어는 무엇일까? 


휘게? 그건 덴마크어고, 

휘바휘바? 그건 핀란드어다.


혹시, 라곰(lagom)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았는가?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스웨덴의 문화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가 바로 이 '라곰'이다. 어쩐지 좀 귀엽게 들리기도 하는 이 단어의 의미는, '지나치지 않고 덜하지도 않은 적당한 상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커피 얼만큼 따라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lagom, 어떻게 지내? 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lagom이다. 우리 말로 하면 '적당히' 정도에 해당하는 표현인데, '적당히' 가 어느 정도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스웨덴어의 lagom은 말 그대로 '알맞은' 혹은 '딱 좋은' 정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라곰'은 스웨덴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깊이 녹아들어 있다. 스웨덴 사람들은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할 때도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몸과 마음을 상해가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인간 관계도, 음식도, 소비도 적당한 게 가장 좋은 상태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물론 모든 이들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라서 어떤 이들은 야망과 성취가 존중받지 못하는 지루한 사회라며 더 큰 꿈을 찾아 북미로 떠나기도 한다. 


많은 한국인들이 가는 미국이나 캐나다, 일본, 호주가 아니라 스웨덴에 와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배경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중 굳이 현지어를 배우지 않아도 영어로 충분히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 유학 혹은 스웨덴 이민의 장점 중 하나이다. 국민의 약 85%가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며, 특히 도시에 살거나 우리가 외국인으로서 접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영어에 능통하다. 나의 영어가 부족하면 부족했지 그들의 영어가 문제가 되는 적은 거의 없다. 학사 이상의 고등교육은 영어로만 이루어진 경우도 많다. 외국인들이 취업할만한 규모가 어느정도 되는 회사들 - Volvo, Astra Zeneca, IKEA - 은 영어가 회사 공용어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고용인의 대부분이 스웨덴인일 지라도 모두 영어로 소통하는데 아무런 거부감이 없다. 그러니 일상 생활, 학업, 업무 등 그 어떤 상황에서도 스웨덴어를 '반드시' 구사해야 하는 상황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스웨덴에 살기 위해서 스웨덴어를 배울 필요는 없는걸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웨덴에 오기 전에는 아르헨티나와 파나마 등에서 공부와 일을 했었다. 스페인어를 전공했기에, 스페인어를 이미 구사할 줄 알았으며, 아르헨티나에서 유학생으로 지내던 시기에 언어에 매진하여 이후 스페인어 공인 자격증 DELE의 최고 수준인 C2 자격을 취득했다. 그러니 스페인어권 국가에 살면서 언어로 애를 먹을 일은 없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물론 스웨덴과는 달리, 대다수의 스페인어권 국가들은 - 유럽에 있는 스페인을 포함해서 - 영어가 그리 잘 통하지 않는다. 다국적 기업에서나 관광지에서야 크게 무리 없이 소통이 가능하다지만,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영어 실력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요인과도 관련되어 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많은 사람들은 최소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운다. 많은 이들이 어려운 영어 지문을 척척 해석하고, 미드와 헐리우드 영화를 즐겨보며, 영어로 된 노래 가사에 거부감이 없다. 그럼에도 길거리에서 외국인이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걸면 'I don't speak English' 라고 영어로 대답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며 대화를 거절하거나, 아니면 속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지도와 손짓을 동원해 친절한 한국인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시험으로 측정하는 영어 실력은 결코 뒤쳐지지 않지만, 유독 회화에는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학교 밖에서는 파주 영어마을이나, 고액의 사설 학원에 가지 않고서는 영어로 말할 기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많은 스페인어권 국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중남미에 살 때 스페인어를 못하면 삶의 입지가 상당히 좁아진다고 봐야한다. 인터넷 설치, 은행 업무 등은 당연하고, 현지인 친구를 사귀는 것은 높은 확률로 불가능해진다. 반대로 스페인어를 뛰어난 수준은 아니더라도 중급 이상만 구사하면 이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사람들은 '다른 외모를 가진' 당신이 완벽한 스페인어를 구사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더듬더듬 단어와 단어를 이어 구사하는 수준일 지라도 외국인으로서 스페인어로 말하려고 한다는 점을 높이 사며, 영어로만 소통을 고집하는 이에게와는 다른 정도로 마음의 문을 연다.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스웨덴에 왔을 때에도 같은 생각을 했다. 물론 사람들의 영어 수준은 뛰어나다. 룸메이트, 교수님, 직장 상사, 친구들 모두가 영어로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며, 그 누구도 내가 스웨덴어를 못한다고 면박주지 않는다. 상점이나 길에서 대뜸 영어로 말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제삼지 않으며, 되려 스웨덴어로 말을 시작해 미안하다며 바로 영어로 바꾸어 말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정도 표면적인 이야기이고, 어쨌든 이 나라의 공용어는 스웨덴어이다. 영어로 소통할 능력이 되는 것과, 영어로 감정을 나누고 관계를 쌓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단기간의 여행이 아니라 최소한 연단위로 머물거나 그 이상의 기간을 거주할 계획이라면, 현지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필수라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하루 8시간씩 영어만 쓰는 사람들도 가족과 통화할 때는 스웨덴어를 쓰고, 명절에는 스웨덴 음식을 먹으며, 어릴적 보고 자란 스웨덴 만화를 추억한다. 출근이나 등교 전에는 스웨덴어로 된 뉴스를 듣고, 스웨덴어로만 설명이 적힌 제품을 사고, 스웨덴어로 정치를 논하고 스웨덴어로 메일과 메시지를 쓴다. 그러니 뛰어난 영어 실력과는 별개로, 스웨덴에 거주하면서 스웨덴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스웨덴어는 일상의 공기같은 것이다. 스웨덴어를 배울 생각이 전혀 없는 외국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은 없을지라도, 한마디라도 말을 더 섞고, 스웨덴에 관한 지식과 경험을 알려줄 만큼의 열의는 갖게 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201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늘어난 이민 행렬의 여파로, 현재 스웨덴에 거주하는 인구 중  25% 이상이 외국 출신의 이민자라고 한다. 난민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취업 이민, 결혼 이민 등 배경은 다양하다.  

출처: Statistics Sweden (2018)

이러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을 위해, 스웨덴 공공기관과 사기업들은 대부분 스웨덴어와 영어 두 가지 버전의 홈페이지를 운영한다. 때로 한국의 웹사이트들이 한국어와 영어 버전에서 다른 양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과는 달리, 두 버전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정보의 내용은 완벽하게 동일하다. 이민청과 국세청 등의 외국인을 자주 상대하는 기관 외에도 모든 곳에 영어를 비롯하여 아랍어, 페르시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다국어로 된 정보가 비치되어 있으며 이를 구사하는 직원들이 대기하고 있다. 병원 응급실에서도 전화로 의료 통역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웬만한 공공기관에 전화를 걸면 영어로 통화할 수 있는 옵션이 제공된다. 


다른 한편, 스웨덴 정부는 이주민들을 위한 스웨덴어 교육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SFI (Svenska för Invandrare) 라 불리는 스웨덴어 교육 시스템이 있다. 스웨덴에 거주하며 일종의 주민등록번호 - 혹은 외국인 등록번호- 에 해당하는 personal number를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가 무료로 자신의 수준에 맞는 스웨덴어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각 지역마다 대면 수업을 들을 수 있는 학교가 마련되어 있으며,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는 온라인 수업 역시 활성화되어 대면 수업 100% 혹은 온라인 학습과 병행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수업이 제공되고 있다. 학업 혹은 업무 스케줄에 따라 등교 횟수 및 오전, 오후, 저녁 등 시간을 고를 수 있으며 국가에서 공인한 자격이 있는 교수자로부터 수업을 듣게 된다. 학급 규모는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한 반에 20인을 넘지 않아 충분한 질의 응답 및 회화 연습이 가능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학습을 진행하면, 담당 선생님의 평가 및 상의 하에 국가 공인 스웨덴어 시험을 단계별로 치를 수 있다. 스웨덴 혹은 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학습자의 경우에는 A, B단계를 건너뛰고 C 단계부터 학습을 시작하게 되고 이어지는 D단계 학습이 끝나고 시험을 통과하면 '이민자를 위한 스웨덴어' 단계인 SFI는 종료된다. 이후에는 SAS (Svenska som Andraspråk, 제2 외국어로서의 스웨덴어) 단계가 시작된다. SAS Grund (초등학교) 레벨부터 SAS Gymnasiet 1, 2, 3 (중-고등학교) 레벨을 마치고 나면 외국인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스웨덴어 수준은 끝났다고 보면 된다. 물론 대부분의 스웨덴에 사는 외국인들에게 SAS는 너무나도 먼 얘기이고, 앞서 말한대로 영어가 통해도 너무 잘 통하는 곳이다 보니 특별한 개인적 동기 혹은 배경이 있지 않고서는 SAS Grund 단계까지 가는 외국인은 흔치 않다. 어느 수준까지 공부할 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다. 아직까지는 영주권 신청시에도 언어 성적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2021년부터 언어 능력을 자격 요건에 포함하는 논의가 진행중으로, 2025년부터 언어 및 문화 이해도를 포함하는 안이 제안된 바 있다) 


결론적으로, 스웨덴어를 배우지 않아도 생활과 업무가 충분히 가능한 사회 분위기와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만, 동시에 스웨덴 정부는 이민자들이 스웨덴어를 배우도록 하는 데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스웨덴 사회가 추구하는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문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스웨덴에 사는 외국인으로서 스웨덴어를 배워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하지만 다양한 국가에서 정착형 이방인으로 살아본 경험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나는 여행이 아니라 일정 기간 이상을 한 지역에서 머물 거라면 현지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주의다. 일정 수준 이상 도달하기는 어려울 지라도, 최소한 이웃들과 스웨덴어로 몇 마디 나누고, 신문 헤드라인을 이해하고, 대중교통 앱에 나오는 교통 상황 관련 문장 정도는 이해해야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웨덴'의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 실력은 흥미와 애정이 기반된 노력을 통해 발전한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재미있고 보람되지만 동시에 아주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스스로 바보같아지는 경험을 몇 개월에서 몇년은 감수해야 하고, 때로는 꼴도 보기 싫은 타인의 언어를 싫어하는 반찬처럼 억지로 씹어야 한다. 답답해하는 상대의 표정을 보며 얻는 상처는 때로 쉬이 잊혀지지 않으며, 꾸역꾸역 어린애 수준의 작문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도 있다. 내가 왜 이걸 하고있지,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수도 없이 찾아오고, 이럴 시간에 실무와 관련된 공부를 하는게 이득이라는 생각도 들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유혹을 이겨내고 꾸준히 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현지인들간의 대화를 알아듣고, 현지어로 된 매체를 읽을 수 있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인 것만 같던 이들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고, 내가 밟고 서 있는 땅이 더이상 타지가 아니게 된다. 매일이 어려운 미션같던 일상의 과제들은 그저 어느 하루의 평범한 일상이 된다. 언어를 통해서 더는 홀로 외로운 이방인이 아니게 된다. 


약 9년째 스페인어 강의를 하며 늘 하는 말이 있다. 언어의 힘은 강력하다. 언어에는 지성과 감정과 관계, 그리고 역사가 담겨있다. 남의 땅에 사는 우리에게 비록 더 급하게 처리해야 일들이 산적해 있지만, 그래도 시간을 내어 그들의 언어를 배워보는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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