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그 이면의 이야기들
멀고 먼 북유럽의 조용한 나라 스웨덴이 전세계 인터넷 유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꽤 드문 일이다. 그것도 뛰어난 복지 수준, 유명한 배우나 운동선수, 아니면 선진화된 제도 등이 아니라 '자식 친구에게 밥 안주기'라는 다소 해괴(?)한 이유였다. 이를 계기로 내가 스웨덴에 살고 있는 걸 아는 친구들이 SNS로 연락을 해왔다. 그게 정말 사실이냐며, 무슨 그런 나라가 다 있냐고. 이곳에 살고 있고, 또 현지인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나에게도 에이 설마, 싶은 이야기였다. 웹상에서는 스웨덴 출신의 유저들과 네덜란드, 덴마크 등 근방 국가 출신의 유저들이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고 대세는 '개별 가정에 따라 다르다'로 기울어가는 것 같았다. 아무리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문화라고는 해도, 스웨덴 사람들이 어린 아이에게 식사를 주지 않을만큼 매정하거나 상식이 없는 사람들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 주변의 모든 스웨덴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이 이야기를 꺼내 의견을 물었다. 한주간 나를 학교, 직장, 그리고 펍과 카페에서 만난 스웨덴 (그리고 근방 유럽국가 출신의)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이 질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각종 그룹 채팅방과 SNS에도 질문을 올려서 N=50 정도의 결과값을 얻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실이다.
스웨덴에서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집주인 친구가 가족들과 식사를 하는 동안에 친구의 방에서 친구를 기다려야 할 수 있다.
반쯤 농담삼아 '이런 얘기가 있던데, 설마 사실이야?' 라고 물었을 때 많은 친구들이 한숨을 푹 쉬며 '맞아, 그렇긴 한데-' 로 시작하는 장황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당연히 식사 자리 초대 여부는 각 가정의 문화와 친구와의 관계, 그리고 친구 부모님의 성향 및 식사 전후의 상황에 따라 상황은 달라진다. 어린 아이가 반나절 이상 쫄쫄 굶도록 두는게 당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와 문화적 배경이 있다. 거시적인 사회 문화적 배경과 개인적이고 다소 비공식적인 친구들의 증언(?)을 엮어서 이야기하자면, 그 이유로 아래의 세 가지를 들 수 있겠다.
1. 스웨덴의 개인주의
이 이유는 스웨덴이 못살던 시절, 남의 집에서 음식을 요구하는 것은 실례라는 문화가 생겼다는 설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것 같다. 이 글에서는 경제적인 여유는 차치하고, 문화적 맥락에 대해서만 언급해보기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는 너와 나의 관계는 1:1의 관계라는 데에서 시작한다. 부모의 감독 없이 서로의 집에 놀러갈만한 나이라면 너의 관계는 너의 친구와의 관계이고, 타인의 부모가 너의 식사 시간을 때맞춰 챙겨야 할 의무는 없다. 반대로 알러지가 있거나, 가리는 음식이 있거나, 부모와 본인의 신념 혹은 성향 등에 따라 먹는 음식이 다를 수도 있고, 그로 인해 네가 남의 집 음식을 원치 않을 수도 있다. 글로 적으니 무척 정이 없어 보이지만, 반대로 이 경계선을 지키지 않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피할 수 있는 중요한 원칙이기도 하다.
2. 가족 중심주의
두번째 이유는 좀더 흥미롭다. 의외로 많은 친구들이 이 설에 힘을 실어 주었다. 스웨덴의 중고교 학생들은 3시경에 수업을 마치고, 노동자들은 주로 4-5시 사이에 퇴근한다. 그러면 늦어도 6시 전에는 가족 모두가 집에 도착한다. 저녁 식사는 가족간의 신성한 약속이고, 특별한 사정을 미리 고지하지 않는 한 가족 수에 맞춰서, 그 날의 식사 담당 멤버가 식사를 준비한다. 엄마, 아빠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그날 식사 준비 담당인 경우도 흔하다. 이 약속에서 벗어나서 다른 누군가를 초대한다거나 혹은 다른 곳에서 먹고 와서 저녁 식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다른 가족 멤버들에게 그 사실을 미리 고지해야 한다. 매일의 저녁 식사는 하루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 대화의 장이자 일종의 신성한 가족 행사다. 이러한 행사에 예고 없이 불참하거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데려오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이유이다.
3. 약속과 계획의 중요성
마지막 이유는 앞서 언급한 내용과 맞닿아 있다. 당연히 스웨덴 아이들도 친구네 집에 가서 놀고, 같이 게임을 하고, 때로는 오래 머물고, 친구네 집에거 자고 가기도 한다. 한쪽의 부모님이 귀가가 늦으신 편이라면 더더욱 드물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것은 부모님 사이에 사전에 협의가 되어야 하며, 부모님들간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녀간에도 미리 합의가 되어야 하는 일이다. 가족이 아닌 인원을 대접하는 일이 항상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는' 단순한 과정이 아닌 것은 말해 무엇하랴. 뭐라도 하나 더 꺼내줘야 하고, 잘 먹는지 신경이 쓰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가족간에도 식사 일정의 변화를 미리 고지해 주어야 하는 문화에서 하물며 남의 가족 멤버가 예고 없이 식탁에 앉는 것이 얼마나 비일상적인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그 상상에 도움을 약간 주자면, 어릴때 친구네 집 거실에서 같이 티비를 보고 놀다가도 그집 아빠가 퇴근해 오시면 어쩐지 어색하고 불편해 자리를 뜬 적이 있지 않은가? 친구네 집의 모든 가족 멤버를 무뚝뚝한 친구 아빠로 환원해 보시라.
이 모든 이야기를 뒤로 하고 다시 한번 진실을 정리하자면, 사실 절반 가량의 친구들은 이와 반대되는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어렸을 때에는 친구네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을 뿐만 아니라 며칠씩 자고 오는 것도 드물지 않은 일이었으며, 지금도 자신의 부모님은 10대 자녀의 친구들을 위해 커다란 화덕에 피자 스무 판을 굽던 때를 그리워 하신다고 한 친구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친구들 역시 자신이 친구네 집에 갔을 때 식사를 대접받지 못한다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던 것이 놀라웠다. 앞서 본 '자녀의 친구가 놀러왔을 때 밥을 주지 않는 문화'에 대한 세 가지 이유와 별개로, 최근 몇 년을 제외하고는 단일 언어, 단일 문화권을 유지해온 스웨덴에서 각 가정의 문화가 이렇게 논쟁을 일으킬 만큼 상반된 채로 유지되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나에게는 이 문화 차이가 옆집 누구네가 그랬다더라, 그러면 안되는거 아니냐, 하며 서로를 헐뜯거나 고치려고 하는 문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와는 다르더라도 남을 재단하거나 고치려고 하지 않는, 갈등을 극단적으로 피하는 이 평화로운 문화의 장단점을 논하자면 밤을 새도 모자라지만,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문화의 장점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적 소풍가던 날 아침을 떠올려본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래 쭉 직장생활을 해온 엄마는 전날 밤 재료를 준비해두고 또 아침에 새벽같이 일어나 각종 재료로 김밥을 말고 언니와 내 입에 꼬다리를 쏙쏙 넣어주었다. 음료는 살얼음이 얼게 두시간 전에 냉동실로 옮겨두고, 당근은 타면 안되니까 약한 불에 볶고, 밥이 덜 식었지만 시간이 모자라니까 손부채룰 부쳐가며 밥을 섞는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급식 생활을 해서 이 고생은 1년에 한두 번이면 족하게 되었지만, 한동안 급식실인지 급식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도시락을 싸서 다녀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엄마는 그때 내 딸의 도시락이 같은 반 친구들의 것과 비교될까봐 매일 저녁 퇴근길에 장을 봐왔다. 나는 그냥 김밥 한줄 사서 가도 된다고 했지만 엄마는 그런걸 매일 먹으면 건강을 망친다며 매일 아침 저녁으로 고된 도시락 준비를 했다. 변변한 반찬이 없던 날에는 남은 반찬에 햄을 부쳐 싸주었다. 나는 건강에 안좋다며 자주 먹지 못하던 통조림 햄을 싸가게 되어 그저 기분이 좋았는데, 엄마는 제대로 된 식사를 준비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의 걱정이 무색하게 나는 잘 먹고 잘 자라서 잔병치레 없는, 사시사철 헌혈이 가능한 건강한 성인이 되었다. 떠올리면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아련한 기억들 이면에는, 내 자식이 남들에게 얕보이거나 혹은 직장에 다니는 엄마의 '주부력'이 욕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압박이 존재했다.자녀의 친구가 놀러오면 맛있는 과일과 손수 만든 간식을 내오고, 재밌게 놀다 가라며 부모님에게 대신 전화를 해주고, 혹여라도 아이가 제 집에 돌아가서 우리 집의 흠을 잡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 과연 항상 따스하고 정이 넘치는 문화이기만 할까.
결론적으로, 그 어떤 문화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지 않다. 한국인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무려 밥을 안주는' 문화는 그 나름의 이유와 배경이 있고, 듣다보면 이것이 반드시 정없는 개인주의 때문만이 아니라 오히려 끈끈한 가족 내의 원칙과 애정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편을 선호하는지는 개인과 가정의 자유이다. 다만, '상호 합의된' 원칙을 따르기만 한다면 뒤에서 몰래 서로를 흉보며 나와 너를 같은 선상에 맞출 필요는 없다는 존중의 문화가 그 이면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냥 이해 못할 문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사족: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등의 국가에도 비슷한 문화가 있다고 한다. 남유럽과 중남미,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특히 인도 친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흥미로운 것은 전자의 국가들에서는 각 가정마다 다를 것이며, 그것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일반적이었다면 후자의 국가들에서는 이는 천인공노할(!) 일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국가별 개인주의적 성향의 차이에 따른 상반된 반응이 흥미로웠다.
(커버 이미지 출처: independent.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