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몰랐던 그의 세상
불안장애, 자기애성 인격장애, 리플리 증후군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했던
어쩌면 나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고 오만하게 생각했던 그의 세상은 내가 알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솔직히 말하면 전남편의 범죄사실이 이혼의 결정적인 계기는 됐지만,
그게 내가 이혼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나를, 우리 아기를, 우리 가족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더 솔직해지자면, 만약 그가 횡령했던 모든 돈을 우리 가족을 위해서 썼더라면 난 이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 범죄자의 가족이 되어 그와 함께 고통받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는 그 큰돈을 전부 본인의 거짓말을 위해서 사용했다.
덕분에 미련 없이 이혼을 결심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이지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다.
그는 이혼하는 그날까지 나를 사랑한다고 했고, 어제도 나에게 구구절절 자신이 우리의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증명하려 했지만, 그의 행동에선 그 사랑을 단 한 톨도 느낄 수 없다.
그 새끼는 지 생각만 한다
최고급 호텔에서 최고급 샴페인으로 회식하면서 남편은 회사의 회식비가 많이 지원됐는데 회식을 너무 못해서 한 번에 다 써버리는 거라고 했다. 알고 보니 남편의 사비로, 정확하게는 남편이 횡령한 돈으로 하는 회식이었다.
자기가 일을 너무 잘해서 회사에서 복지 및 성과급 차원으로 부모님들께 안마의자를 사줬다고 했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 댁에 거대한 안마의자가 도착했었다. 알고 보니 그것 또한 남편이 횡령한 돈으로 하는 자작극이었다.
남편은 마케팅 업무를 하며 인플루언서들과 협업할 일이 많았다. 같이 일하는 인플루언서가 남편에게 생일선물로 명품넥타이를 사줬었다. 내가 너무 과한 선물이라고 돌려주라고 하자 남편은 자기가 그 인플루언서를 섭외했고, 출연료도 넉넉하게 책정해 줬다고 그것에 대한 보답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 인플루언서의 이사 선물로 남편은 300만 원이 넘는 최고급 냉장고를 사줬었다. 우리 집 냉장고는 내가 혼수로 사 온 것이었는데 우리 집 냉장고보다 훨씬 좋은 모델이었다.
이혼하기 한 달 전쯤에 우연히 남편의 메신저를 본 적이 있었다. 같은 팀 여자 직원에게 10만 원이 넘는 콘서트 티켓을 선물했었던 걸 알게 되었다. 아프리카 TV 별풍선으로 100만 원이 넘게 결제된 내역도 보았다.
그즈음 난 남편이 바람을 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도를 하나? 하고 의심했지만 추궁하진 않았다.
자기가 일을 너무 잘해서 회사에서 성과급으로 우리가 갖고 있던 전세자금 대출을 모두 상환해 준다고 했다. 대출은 남편 명의로 받았었기 때문에 난 모두 상환됐다는 남편 말만 굳게 믿고 따로 확인해 보진 않았었다. 알고 보니 이 또한 거짓말이었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남편은 재벌 사위 행세를 하고 다녔다고 했다. 회사는 취미로 다니는 거라고.. 본인이 타고 다니는 아반떼는 평직원으로서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기 위해 뽑은 세컨드카인척하고 다녔다고 했다. 우리는 그때 그 차 할부금을 열심히 갚고 있었는데도.
이 얘기를 듣고 우리 아빠는 본인이 재벌이 아니어서 미안하게 됐다고 비아냥 거리셨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박장대소를 했다. 아직도 생각할수록 웃겨 죽겠다. 진짜 미친놈인가^^
이 외에도 일일이 나열하지 못한 수도 없이 많은 거짓말이 있다. 모든 거짓말은 하루에 알게 된 것이 아니고 몇 달에 걸쳐서 하나씩 알게 되었다. 아직도 내가 모르는 거짓말이 남아있을 확률이 크다. 특히 작년 12월 한 달은 거의 매일매일 경악스러운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거나 들려왔었다. 드라마라고 해도 억지라고 작위적이라고 할 만큼 어이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2023년 12월 6일 밤 이후로 알게 되는 그는 내가 지난 10년간 지지고 볶고 함께 삶을 꾸려갔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책임감 강하고, 비록 서투를지언정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워커홀릭이며, 똑똑하고 능력 있고, 비록 말은 무뚝뚝하게 할지언정 마음은 따뜻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내 남편은 신기루였다.
잘생기진 않았어도 순박하고 정직해 보였던 그의 얼굴은 훌륭한 가면이었다.
까도 까도 끝이 없는 그를 이제부터 양파라고 부르겠다.
별거를 시작하고 이혼신청을 하기 전까지 약 한 달 동안 양파와 대화를 몇 번 나누었다.
나는 양파에게 진지하게 정신과를 가야 할 것 같다고 조언했다.
너 리플리 증후군인 게 확실하다고.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고. 심각해 보인다고.
양파는 내 말을 잘 듣는 척을 해야 하니까 병원에 다녀왔다. 양파는 불안장애를 진단받았다고 했다. 인정욕구도 매우 크다고 했다. 나와 내 가족에게 너무너무 잘 보이고 싶은 나머지,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라 했다. 자기가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내가 자기를 버릴 것 같았단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닌데.
웃기는 사실은 난 그에게 돈 많이 벌어오라고 한 적이 없다. 열심히 모아서 저축하자고만 했었지.. 그리고 양파는 나에게 큰돈을 벌어다 준 적도 없다. 생활비는 나라에서 받는 육아휴직지원금과 내 비상금대출로 주로 충당했고, 돈이 부족해지면 부족 부분만 양파가 메워주는 형식으로 사용했다. 난 내가 그렇게 양파의 월급을 아끼면 양파가 아낀 돈으로 이자가 가장 높은 신용대출을 상환하고 있는 줄 알았다. 멍청하게도. 은행 입금내역을 확인해 볼 생각을 왜 안 했을까.
양파와 그런 대화를 할 때쯤엔 난 양파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서 양파가 하는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양파는 자기가 받은 정신병원의 심리검사 결과지를 보여줬었다.
거기엔 불안장애와 함께 '자기애 성격장애 가능성이 있음'이란 문구가 쓰여 있었다.
아.
얘는 나르시시즘이 있구나.
납득이 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도망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