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돌잔치가 끝난 지 3주가 채 안된 날이었다.
남편은 그즈음 회사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감사를 받는다고 했다. 회사 자금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본인이 사용했던 사업비 내역을 다 조사 중이라고..
자기는 열심히 일하기만 한 건데 이런 조사를 받게 돼서 너무 억울하다고 했다.
법무법인에 근무하는 우리 아빠는 사위가 혹여나 불이익을 당할까 봐 아는 변호사 후배들한테 자문을 구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우리 가정을 도와주고 계셨다.
나도 역시 주변 법조인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남편을 응원하고 있었다.
내심 이상하긴 했다.
남편의 전 직장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내 남편은 가는 직장마다 이런 일을 겪게 되는 걸까.
나도 직장생활을 하지만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업계의 특성이 달라서일까? 혼자서 약간의 의구심을 품었다.
그렇지만 너무 힘들어하는 남편 앞에서 나의 의구심을 티 낼 순 없었다.
원래도 남편의 육아 참여도는 매우 낮은 편이었지만 그즈음엔 정말 나 혼자 육아를 감당해야 했다.
그냥 그렇게 혼자 육아를 감당하는 것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남편을 응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버텼다.
23년 12월 6일 수요일
출근하는 남편이 우리 아빠에게 조언을 구한다고 저녁에 내 본가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밤 10시, 아이는 잠들었고 남편은 이제 내 본가에서 나왔다고 자기 부모님께도 드릴 말씀이 있어서 시가에도 다녀온다고 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남편을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갑자기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우리 집으로 오는 중이라고..
"엄마 왜? 지금? 그냥 전화로 하면 안 돼? 아기도 잠들었어."
"아냐 얼굴 보고 말하자 엄마 지금 가고 있어 거의 다 도착했다."
너무 불안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지?
밤 11시쯤 엄마와 아빠가 심각한 표정으로 도착했다.
잠깐 앉아봐 하고는 엄마가 내 손을 꼭 붙잡는다.
"너무 놀라지 말고 잘 들어. 김서방이 회사 돈을 횡령했대. 금액이 한 3억 정도 된다더라.."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됐다
멍하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배신감에 온몸이 떨렸다.
"엄마 이게 무슨 말이야? 이해가 안 돼.."
엄마와 아빠는 나랑 내 남편이 너무 크게 싸우다 혹시라도 동반자살이라도 할까 봐 너무 무서워서 나랑 아기를 데리러 오셨다고 했다.
거실 한가운데 주저앉아 나는 가슴을 치고 땅을 치고 엉엉 울었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잘 안 되는 와중에 눈물이 끝없이 나왔다.
내가 거실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못하고 통곡을 하는 동안 엄마랑 아빠는 집에 있는 캐리어란 캐리어는 다 꺼내서 짐을 쌌다.
아기 분유포트, 기저귀, 아기 내복, 아기 장난감.. 온통 아기 물건들로 캐리어 4개가 꽉 찼다.
짐을 다 싸니 새벽 2시쯤이 되었다.
곤히 자고 있는 아기를 깨워서 안았다.
아기는 좋아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보니 마냥 신이 나는 듯 방긋방긋 예쁘게 웃었다.
나는 그런 아기를 보며 가슴이 조여들어왔다.
무서웠고
겁이 났다.
이렇게 예쁜 아기를 두고 범죄를 저지른다고?
그 새끼는 아빠가 맞나?
분노와 슬픔, 절망과 두려움.. 그 밖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끝없이 소용돌이쳤다.
그렇지만 아기를 품에 안고 주저앉아있을 순 없었다.
이 아이를 지켜야 하니까.
나는 엄마니까.
야반도주하듯이 내가 살던 집을 떠났다.
하와이 신혼여행을 함께했던 내 캐리어는 그렇게 내 별거도 함께했다.
*이름은 익명을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