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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리 May 13. 2024

별거를 시작한 날 2

지옥의 포문이 열렸다

"별거를 시작한 날" 과 이어지는 글입니다.


도망치듯 살던 집을 빠져나와 부모님의 차를 타고 끝없이 눈물을 흘리며 본가로 갔다.


아이를 카시트에 앉혀야 하는데 부모님 차엔 카시트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아기띠를 해서 아이를 품에 안은 채였다.

내 사랑스러운 아이는 그 와중에 어찌나 해맑은지

천사 같은 미소로 방긋방긋 할머니와 엄마에게 사랑을 표현했다.


그런 아이의 얼굴을 보는데 가슴이 미어져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이를 안은 채로 까무러칠 수는 없으니까 입으로는 심호흡을 하고, 눈으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내가 어릴 때부터 살던 동네로 향했다.


부모님 댁에 도착해 잠든 아이를 눕히니 새벽 3시였다.

짐정리도 해야 하고 아이 분유 물도 준비해야 하는데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저 아이 옆에 누워만 있었다.

그렇게 아이 옆에 누워 가만히 아이만 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남편이었다.


남편은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너는 혼자서도 아기를 잘 키울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자기가 죽어서 해결한다고 아버님 어머님이랑 우리 아기 잘 키우라면서 나한테 유언을 남기듯 중얼거렸다.


너무 화가 났고 너무 무서웠다.


"이 미친놈아!! 이 무책임한 새끼야!! 너 혼자 죽어서 도망가면 끝이야?? 개소리하지 말고 당장 여기로 와!!"


두려움과 배신감에 온몸이 떨리는 와중에 난 울며 소리 질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처음부터  진짜로 죽을 생각은 없었던 것 같지만 그땐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렇게 그는 새벽 4시쯤이 되어서 나의 본가에 왔다.

와서 그는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빌고..

난 욕하고 때리고 소리 지르고..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었다.

보다 못한 부모님이 겨우 나를 진정시키고

역시 불안정해 보이는 그를 다독이셨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일단 자라고.

네가 지금이라도 자수를 하고 돈을 돌려주면 회사에서도 널 형사고발 하진 않을 거라고. 감옥은 안 갈 테니 걱정 말라고.


그는 나보다 먼저 침대에 누웠고 나는 거실에서 좀 더 심호흡을 하고 방에 들어갔다.

들어가니 그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흐흐흑 나 감옥 가면 어떡해...."라고 말하며...


그 흐느낌을 듣는 순간 들끓던 화가 싸늘하게 식었다.

천년의 정도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진짜 오만정이 싹 가신다는 게 이 느낌이구나 하고 알았다.


날 배신하고, 우리 아기를 배신하고, 우리 가족이 함께할 모든 삶의 기반을 망가트린 뒤에도 그는 자기가 감옥 갈까 봐, 오직 그것만 걱정하고 있었다.


그를 무시하고 난 자고 있는 아기 옆에 누웠다.

아기와 나는 바닥에 그는 침대에.

아기가 태어난 뒤 정해져 바뀌지 않은 각자의 자리에서 그렇게 지옥의 첫 날밤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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