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우리는>이 아저씨에게 글을 쓰게 만든다.
모처럼 달렸다. <그 해 우리는> 쉬지 않고 달린 작품은 오랜만이고, '아, 완결 난 다음에 볼 걸.'이라는 마음도 오랜만. <이태원 클라쓰>의 사랑 천재는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로 돌아왔고, <기생충>의 나쁜 과외 오빠는 자유롭게 살면서 돈도 잘 벌면서도 한 여자만 사랑하는 일러스트 작가님으로 돌아왔다. 둘 다 매력 터지는 인물들인데 공통점이 있다. 솔직하지는 않다. 그래서 그만큼 지질하다. 그걸 알면서도 또 그런다.
여자는 자기를 지키며 살아야 했다. 자기의 열등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남자를 버리고 몇 날 며칠을 울었다. 자기를 지키며 살아야 하는 이는 '잘못했어.' '미안해.'를 잘 못한다. 우리는 배우자나 애인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면 '왜 쟤는 사과를 못 해? 지가 그렇게 잘났어?'라고 쉽게 판단하기도 한다. 맞다. 성격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그냥 자기를 지키며 험악한 세월을 살아온 흔적일 수도 있다.
남자는 분명하게 얘기를 안 한다. 그러다가 화가 나면 지질한 얘기를 분명하게(!) 한다. 구석에 몰리면 최악의 대사를 내뱉는다. 그리고 집에 가서 이불 킥을 시전 한다. 하루 종일 도시락 싸들고 쫓아다니니까 알긴 알겠는데, 좀 분명하게 말해주면 좋겠다. "사랑해."라고. 그런데 보통 이런 사람들은 '그걸 꼭 말해야 알아? 보면 몰라?'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랑이 쉽지 않다. 남의 사랑은 단순한데 내 사랑은 단순하지 않다. 다른 사람 장기에는 훈수를 기가 막히게 잘 두지만, 정작 내 사랑(결혼) 이야기에서는 고장 난 로봇이 된다. 아내가 묻는다. '왜 미안하다고 말을 안 해?' '브런치에 글로 쓰는 것도 좋은데, 그냥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 안 돼?'
속에서는 "너도 안 하잖아. 나도 상처 받그등? 나도 그 말 듣고 싶을 때가 많그등?"이라고 외치는 초딩이 꿈틀거린다. 이 초딩은 여전히 한 대 맞으면 한 대(두 대?) 때려야 직성이 풀리는 복수의 화신이다. 그런데 그게 너무 꼴사나워서 그렇게 못하고, 한마디 더 했다가 되로 주고 말로 받을까봐 무서워서 복수도 못한다. 그런데 자존심은 상해서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면 되고, 그 말이 듣고 싶으면 그 말이 듣고 싶다고 말하면 되는데. 복수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사는 걸 아는데, 아는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솔직하지도 않다. 나는 성인(Saint)은 아니지만 성인(Adult)이기는 한데. 그래서 오늘도 혼자 이불을 찬다.
이 복수심에 불타는 초등학생은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왜 그리 많은 폐인을 양산했는지 모른다. 사랑해서 미안하고, 미안해서 사랑하는 것 아닐까. 이 두 말은 어찌 보면 같다. 그리고 때로는, 솔직하지 못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기보다 하기 어렵다.
주변 40대 아저씨들이 이 드라마를 본단다. 왜 아저씨들이 달달하고 말랑말랑한 드라마를 혼자 보며 설레어할까? 솔직하지 못했던 삶의 대가를 치르는, 그래서 점점 외로워지는 시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 시점부터 남편들의 등이 불쌍해 보이는 이유는 그가 점점 소녀 감성으로 변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쳐다보지도 않던 꽃나무를 사 오고, 혼자 드라마 보면서 훌쩍거리고. 그럴 것이다. 추잡스럽기 싫고 언제까지나 쿨하고 매력 터지는 남자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속상하고, 그래서 더 지질해진다.
그래서 미안하다. 사랑한다. 또 말은 못 하고 여기에 쓴다. 뭐라고 하지 마라. 솔직하지 못한 나도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