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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르미 Apr 20. 2021

지랄총량의법칙

우리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이유

  "지랄하고 자빠졌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中 세종대왕(한석규)의 대사)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단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한 지랄은 없어지지 않고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참 지랄도 풍년인 법칙이긴 한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이 법칙은 우리 일터와 가정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회사에서 당하면 그게 없어지지 않고 집에서 분출된다. 부부 관계에 어려움이 있으면 하는 일이 잘 될 리가 없다. 무슨 '박물관이 살아있다.'도 아니고, 지랄은 우리 곁에 가까이, 아니 우리 속에 살아있다. 이 글은 제법 괜찮은 글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다음 메인에 걸릴리는 없다고 확신하며 쓴다.




  어느 날, 첫째가 나의 어투를 그대로 따라 둘째를 다그치는 것을 들었다. "야!! 박○○!! 똑바로 안 해? 블라블라..." 아차 싶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큰 딸은 부모의 감정 쓰레기통.'이라는 말이 가슴을 후볐다. 지랄 총량의 법칙은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향해서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다. 지랄이 줄줄 새는 인생이다.


  적지 않은 시간 우리 모두 고통스러웠고, 딱히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할 일은 많았고 대화는 적었고 관계는 힘들었기에, 조금 사랑하려다가도 다시 서로에게 재랄을 하고 그 재랄이 사방을 돌아다니는 악순환. 수없는 남 탓과 자괴감 속에서 참 많이도 힘들었다.


  원래 이 말은 뇌전증에 걸린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을 속되게 표현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염병(장티푸스)'까지 더해지면... 아무튼 '마구 법석을 떨거나 분별없이 행동하는 것을 욕으로 이르는 말'이다. 즉, '지랄'은 아파서 하는 것이다.


   오랜 병을 앓는 가족과 함께 사는 분들은 알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구조적 슬픔이 있다. 한바탕 서로에게 지랄이라도 해서 풀리면 좋겠는데, 그냥 아파서 그런 것을 어쩌겠는가. 아파서 그러는 것을 아픈 사람에게 복수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아픔뿐이다.


  그런데 '아파서 그렇구나.'라는 이해가 시작되면서 나는 조금씩 바뀌어갔다. 정신병원 약봉지에는 '정신병원'이라고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숨은 쉬어야겠기에 찾아갔다.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어떻게 되기를 원하세요?' 아마 내가 미쳤는지 아닌지 알아보는 질문이었으리라. 나는 '일상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답했다.


  나는 기계는 아니지만, 어딘가 고장 나 있었다. 그리고 고장 났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남 탓을 하거나 자책을 했다. '괜찮다.'라고 말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지금도 '괜찮다.'라고 말해 놓고 후회할 때가 많다. 참았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저기서 지랄은 줄줄 새고 있었고, 사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이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한 후로부터 지랄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프다. 맞은 부위나 강도는 다르지만, 이래 저래 참 힘들다. 아파서 그러는 줄 모르고 꾀병하지 말라고 지랄도 참 많이 했다. 내가 아픈 만큼 너도 아팠을 텐데. 결혼식 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음이탈까지 내 가며 고래고래 사랑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못 지켰다. 그리고 이제 좀 미안한 줄 알겠다. 미안해. 진심으로.




  아픈 건 아픈 거다. 괜찮다고 말하다가 어느 순간 억울해져서 지랄하지 말고 그냥 생지랄(?)을 서로에게 베풀자. 그러면 '아, 쟤가 뭔가 좀 이상하구나.' 하면서 엉뚱한 지점에서 풀리기도 한다. 적당히 지랄을 하면 싸우지만 많이 지랄하면 병원에 데려갈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아직 가족이라면 말이다.


  물론 지랄은 여전히 살아있다. 언제든 우리의 관계를 삼키려고 울부짖는 사자처럼 문 앞에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안다. 아파서 그런다. 슬퍼서 그런다. 그리고 부부는, 가족은 그런 것을 용납해주는 사이를 말한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지랄을 받아주는 사랑을 조금 배웠다. 지랄을 사랑으로 덮는 위대한 행위(?)를 조금 할 줄 알게 되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한 때 수많은 청춘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하도 아프다 보니 이제 우리네 청춘들은 그 말을 들으며 이렇게 노래한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동명의 책에 대한 호불호를 표현하는 말이 아님. 아프고 바빠서 못 읽었음.)


  오늘 나의 이 지랄 맞은 고백이 지랄 맞은 인생 그래도 꾸역꾸역 살아가는 누군가에게는 숨 돌릴 틈이 되기를. 아프면 그냥 지랄해요.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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