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따르미 Apr 29. 2021

아빠가 가출을 계획하고 있다

때로는 서로에게 '계획된 가출'을 선물하자

  '아니, 내가 학창 시절에도 한번 해 본 적 없는 가출을 결혼해서 애까지 낳고 하게 될 줄이야.'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부가 있다면 갓 블레스 유. 소심한 가출(얘기 안 하고 혼자 나갔다가 혼자 돌아오는 가출), 대범한 가출(말하고 나가서 슬그머니 돌아오는 가출), 대책 없는 가출(홧김에), 시한부 가출(죽거나 죽일 것 같아서), 무기한 가출(별거), 부부의 가출에는 남녀가 없으며 노소가 없으며 주야가 없습니다. 전천후 가출이에요.


  이제 막 결혼한 분들은 '에이~ 그런 건 드라마에나 나오는 거 아니에요?'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는 언제나 현실의 반영이고, 생각보다 우리 삶은 드라마틱하지요. 그래서 부부는 가출을 하게 될 때도 있고, 가출을 해야 할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가출에 대해 말하려면 일단 '공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전 세대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공간의 중요성을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분은 '나는 형이상학적인 인간이어서 어디에 있든지 별로 상관없어.'라고 생각하는데(종교인이세요?), 그런 사람일수록 함께 살기 힘든 유형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부부는 결혼하자마자 돈과 시간과 노동력을 공유하고 분배하는 시스템 속에 들어갑니다(최유나 변호사님의 말입니다. 팬이에요.). 거기에 하나 더할 것은 '공간'입니다. 부부는 공간을 공유하기 시작합니다. 공간이 주는 유익이 있고, 공간이 주는 압박이 있습니다. 공간을 어떤 감성으로 채울 것인지, 어떤 경험으로 채울 것인지, 이전에는 작든 크든 내 공간을 내 멋대로 채우며 살았으니 편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공간'을 '우리의 감성'과 '우리의 경험'으로 채워야 합니다. 이 문제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주제가 '가출'이므로,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기로 합니다. '공간이 생각보다 중요하고,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정도로 정리해 보죠.


  불행하게도, 부부는 결혼하자마자 '일심동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는 길을 시작했을 뿐입니다. 평생 안될 수도 있다는 암울한 말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된다. 된다. 내 눈을 바라봐. 넌 될 수 있고.' 그런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함께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함께 있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함께 있는 게 견디기 힘들 때가 사실 있어요. 같이 있기만 해도 불꽃이 튀던 연애시절과는 또 다른 종류의 불꽃이 튈 때입니다. 입만 열면 험한 말이 오가는 시절도 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의 침묵은 싸우는 것 이상으로 불편하고 불쾌하죠. 미칠 것 같고 죽을 것 같습니다.


  '내가 잘못했어.' '그래 받아줄게.' 해서 풀리는 싸움만 해 본 부부라면 이해 못하실 것입니다. 부부의 세계는 넓고도 깊지요. 예를 들어 시댁과 처가와 겪는 미묘하고 구조적인 문제는 그런 식으로 풀리지 않습니다. 풀린 것 같아도 전혀 안 풀린 경우도 허다합니다. 돈 문제는 어떤가요? 펑크 난 카드값 영수증 앞에서 통장 잔고 없이 "우리 힘내서 함께 살아보자."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이유로 가출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홧김에 짐 싸서 '일단 나가자.' 하고 가출해 보면 깨닫는 절망적인 현실이 있어요. 결혼한 사람은 가출해도 생각보다 갈 데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깊은 빡침을 토로하면 받아줄 사람? 없습니다. 어설픈 친구들에게는 나의 심각한 스토리가 그냥 팝콘 각 입니다. 특히 결혼 초에는 진정한 친구의 씨가 말라 가는 시기입니다. 다 서로 바쁘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가출해서 본가에 돌아가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입니다. 진짜 그만 살고 싶어서 가출한 것이면 모를까, 우리의 싸움을 그분들에게 알리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도 할 말이 많은데 다음에 날 잡고 할게요.)


  가출에는 계획이 필요합니다. 일단 갈 데까지 가서 가출을 하면 계획 없이 하게 되므로 나도 손해고 너도 손해입니다. 조금 올라온다 싶으면 미리 가출을 계획하면 어떨까요? 내 마음도 잘 관찰하고, 서로의 기색도 잘 살피는 거죠. 좀 분위기 괜찮을 때, 배우자와 '계획된 가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겁니다.


  혼자서 가도 되고, 동시에 같이 가출해도 됩니다. 그 순간은 일단 '답 안 나오는 이놈의 방구석에 함께 있기'를 잠깐이라도 그만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서로에게 필요한 시점입니다. 시간은 길어도 좋고 짧아도 좋고, 밤이어도 좋고 낮이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성질 뻗쳐서 나가는 것 말고 서로에게 '선물한 가출'이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 배우자에게는 그것을 선물해 주세요. 늘 그런 것도 아니고, 하루 정도는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계획된 가출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돌아왔을 때, 남편이 집안을 정리해 놓는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여성들이 받고 싶어 하는 선물 1~2순위라고 믿습니다. 밥도 해 놓으면 더 좋고. 애들도 다 먹여 놨으면 따봉입니다.) 스스로 하든 업체를 부르든 '당신이 나간 사이'에 '내가 다녀와서 치워야 하는 집' 말고 '잘 정리된 호텔'을 선물해 보면 어떨까요?


  돈이 들어서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싸우고 홧김에 나가버려서 발생하는 기회비용과 정서적 관계적 손실과 비교해 보면 그리 많은 돈이 들지도 않습니다. 계획된 가출이 아니면 더 많은 비용을 사랑하는 가족도 아닌 더 낙후된 가치들에게 찜찜하게 지불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모텔, 술집, 택시, 대리...)




  끝으로 혹시 내 배우자가 '계획되지 않은 가출'을 감행할 때, 과도하게 정죄하거나 놀라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짜 안 살 생각이면 변호사나 내용증명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래도 가출까지는 아직 소망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너 그 문 나가면 다시는 못 돌아올 줄 알아!"라는 엄포는 드라마에서나 멋있지, 해 놓고 나면 서로 애매해지기만 하는 대사에 불과합니다.


  결혼 초 거하게 한판 붙었을 때, 아내가 짐을 싸서 나갈 채비를 마치고 딸을 불렀습니다. 서너 살쯤 됐을까? "야, 박○○!! 너 왜 안 따라와!!" 서슬 퍼런 엄마의 호통 앞에 사랑스럽고 충성스러운(?) 딸은 꿋꿋이 소신을 밝혔습니다. "싫어. 나 아빠랑 있을 거야." 모두 빵 터졌고, '계획되지 않은 가출'은 그렇게 무마되었습니다.


  제가 남편들에게는 어떤 가출을 선물할지 얘기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그냥 팽팽 돌아가는 컴퓨터나 게임기 하나만 선물해 주시고, 하루에 한 시간만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직접 사면 안 되고 아내가 선물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는 충성스럽고 사랑스러운 당신의 집돌이가 될 것입니다. 


  물론 모든 남성이 그런 건 아니에요. 남성에게도 공감이 필요합니다. 게임기는 악마의 도구가 아니라 그런 공감의 한 종류입니다. 공감을 담아, 서로에게 계획된 가출을 선물하면 어떨까요?


  (꿈을 담아. 오늘은 오글거리는 '세바시' 느낌으로 써 보았습니다. 어욱.)

작가의 이전글 주례석에서만 보이는 것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시작하기

카카오계정으로 간편하게 가입하고
좋은 글과 작가를 만나보세요

카카오계정으로 시작하기
다른 SNS로 가입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