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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르미 Jun 08. 2021

결혼 10주년 기념일에 남은 배달음식 먹은 후기

쿨한척하지말고 기념일을가르치자

  평강 : "10주년 결혼기념일에 먹다 남은 보쌈이라니."

  온달 : "그러게... 그래도 에어프라이어에 한번 돌리니까 맛있다. 그치."

  평강 : "웅."


  10년쯤 살면 제법 이런 느낌의 대화도 가능해집니다. 저 "웅" 뒤에 (더럽게 맛있다.)가 없기를 바라며... 오늘은 부부가 함께 즐거운 기념일을 보내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부부는 각자 살아온 가정에서 기념일을 지키는 문화를 학습합니다. 어떤 가정은 "기념일? 그게 뭐야? 먹는 건가? 우적우적."하고 씹어먹고 잊어먹는가 하면, 그 어떤 기념일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꼭 여행이나 선물,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 온 가정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지혜롭고 다정한 분이라면, 생일이나 기념일을 챙기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 처세술...이 아니고 참 사랑을 표현할 기회인지를 아들에게 가르쳤겠지만, 보통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머 참 본심이 나올 뻔했네요. "오다 주웠다."며 무심한 듯 시크하게 꽃다발을 내미는 아버지는 드라마에나 나오지요. 보통의 부모님들은 "먹지도 못하는 꽃을 왜 사는데?" 하며 아등바등 살아오신 역사를 갖고 계십니다.


  이제 문제는, 기념일을 챙기기는커녕 기억도 못하는 바보 온달과 살아야 하는 평강공주의 마음입니다. 비교적 착한 바보 온달과 결혼한 평강공주는 더 힘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담백한 양반은 어려서부터 생일 같은 걸 챙겨 먹어 본 적이 없고, 그래서 가까이 있는 소중한 사람을 챙겨줄 줄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사돈의 팔촌 결혼식에는 비행기를 타고 가서 부조를 하고 오니 복장이 터질 노릇입니다.


  "에이,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생일이 별건가..." "올해도 안 주고 안 받기 어때?" 이것이 전혀 악의 없이 말하는 그의 레퍼토리입니다. 악의가 없어서 더 악합니다. "돈도 없는데..."라고 한 마디 보탤라 치면, '아니, 내 마음은 돈 삼만 원짜리 꽃다발 값어치도 안되나?'라는 생각에 울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압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호이 호이 하고 있으면 둘리인 줄 압니다. 괜찮은 줄 알아요. 그래서 남자든 여자든 먼저 대화와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결혼 전에 내가 살았던 집에서는 기념일을 어떻게 보내었는지, 그래서 나는 우리 가정의 기념일을 이런 식으로 보냈으면 한다는 소박한(?) 소원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지요.


  '옆구리 찔러 절 받기' 같아서 자존심 상한다는 걸 압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꼭 '누가 누구에게 챙겨주어야 하는 날'이 아니죠. 우리는 가정을 이루었고,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꼭 교회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엄마에게 "남편 생일상 미역국도 안 차려주고 뭐했니?"라는 말을 들으면 어떨까요? "왜 시어머니도 가만히 있는데 엄마가 난리야?"하고 한바탕 쏘아붙여 주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생일상을 차려줄 수도 있고, 아내가 남편의 생일상을 차려줄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조금 자란 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해도 됩니다. 


  기념일을 지키는 문화는 자녀들에게도 학습되어야 합니다. 가르쳐주지 않으면 모르더라고요.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아이로, 사랑을 주는 것을 기뻐하는 아이로 자라야 그 아이는 사랑을 받을 줄도 아는 사람이 됩니다. 돈을 많이 모으는 것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인생에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알려주세요.


  내가 가족 중 누군가가 끓여준 미역국을 꼭 먹어야 마음이 흡족한 사람이라면, 평소에 배우자에게 얘기하면 됩니다. 기념일에 여행을 가고 싶다면, 돈을 모으고 계획을 함께 짜면 됩니다. 받고 싶은 선물이 있다면, 그것이 내게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지 프레젠테이션 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기대감만큼이나 큰 실망을 살짝궁 표현하면, 바보 온달은 보통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평소에 그런 걸 원한다고 말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갑자기 화를 내지?' 그때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라고 대화를 이어가지 마시고, 기념일을 함께 즐기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서로를 향한 사랑의 표현을 준비하며 느끼는 행복을 맛보게 해 주세요.


  바보 온달이 사랑받고 자라지 못해서 사랑할 줄 모른다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세요. 처음부터 차근차근 따뜻하게 알려주면, 평범한 바보 온달은 조금씩 배우고 10년쯤 되면 시늉이라도 내게 됩니다. 실제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기쁘기 때문이에요.




  끝으로, 자존감이 세계관 최강자인 저희 집 둘째(아들, 만 4세)와 엄마의 대화입니다. 1년 동안 매일 12월(자기 생일)이 됐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는 아이입니다.


  엄마 : 너무 귀여운 ○○아, ○○이는 엄마랑 함께 살지 못하게 되면 어떨 것 같아?

  ○○ :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그러면 엄마가 참 불쌍할 것 같아.

  엄마 : (소스라치며) 아니!? 왜? 왜??

  ○○ : (진지하게 슬퍼하며) 나랑 살지 못하니까...

   

  사실 우리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선물이기는 합니다. 건강히 살아있어 주기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지요. 그러나 '그 고마움을 표현하는 마음 씀씀이'는 우리의 사랑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작년엔 일하느라 바빠서 예약했던 식당을 취소했고, 올해는 먹다 남은 보쌈으로 때웠으니, 내년 결혼기념일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글을 마칩니다. 


  여보, 10년 동안, 많이 미안하고 그보다 더 많이 고마워요. ㅅㄹㅎ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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