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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휘지 Sep 18. 2022

지구에서 하차하기 좋은 날

3화. 10월 지방직 시험 직후 사흘 (2021. 10. 19)

  공무원 시험을 관두기로 결심했다. 2년 동안 외무영사직에 매달렸는데 2년 차 시험에 떨어지고 나니 자신이 없어졌다. 1년 차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는 한 번만 더하면 될 것 같았는데 이제는 일 년 더한다고 해도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불확실함만 더해져 갔다. 무엇보다도 외무영사직 시험을 망치고 지방직 시험을 준비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음에 하려고 했던 건 해외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는데 이제는 살아 숨쉬기 위해 뭐든 공무원만 되면 괜찮다는 듯이 아등바등거리고 있다. 사람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 없는 거라고. 어찌 되었든 하고 싶은 것도 하기 싫은 것도 하면서 살아야 된다고 나와 다르게 현실과 성숙하게 타협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각자에겐 내어줄 수 있는 것이 있고 내어줄 수 없는 것이 있다. 영사직 공무원을 포기하고 행정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내게는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일이었다. 행정직 공무원이 되어 서류를 확인하고 민원업무를 처리하는 내 미래의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 일이 명예로운 일이든 아니든 간에 그저 내가 있을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직관적으로 들었다. 무엇보다 답도 없는 공부를 1년을 더 하면 내 정신을 나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도 충분히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시험공부를 관두고 국가 지원을 받아 취업준비를 하겠다는 결심을 아빠한테 말씀드렸다.

  “저 시험공부 관두려고요. 취직할 거예요.”

  아빠는 예상과 조금도 엇나감이 없이 언성을 높이셨다.

  “집 팔아서라도 공부시켜줄 테니까 그냥 공부해.”

  “저 진짜 이제 못하겠어요. 너무 힘들어요. 2년 동안 할 만큼 했어요.”

  “공부하는 게 대체 뭐가 힘들다는 거야. 취직할 거면 또 취직 준비해야 되잖아. 대체 뭘로 취직을 하겠다는 건데.”

  “웹디자인 쪽 공부하려고 포토샵 시험 신청했어요. 아르바이트도 알아보고 있고요.”

  “웹디자인? 이게 또 뭔 소리야?”

  “정부지원받아서 바로 취직할 거예요. 아빠한테 손 벌릴 생각 없어요.”

  “너 디자이너가 얼마나 힘든 직업인 줄 알아? 매일 밤새워야 되고 돈은 얼마 벌지도 못해.”

  “하지만 저는 예전부터 이 분야를 해 보고 싶었어요... 아빠가 그렇게 걱정하시면 제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다시 말씀을…”

  “시끄러워. 됐어. 네 말 듣고 싶지 않아. 공부나 해.”


  시각은 밤 9시였고 나는 그 길로 집을 나섰다.


  집에서 조금 걸으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산책로가 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시기라 밖은 아주 어두웠다. 밤엔 무서워서 택시도 타지 않고 골목길 근처도 가지 않는 내가, 인적이 드문 산책로를 비틀비틀 걸었다. 걷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붙잡고 화를 잔뜩 내고 싶어질 것 같아서다.


  날은 어두웠지만 날씨는 선선하고 좋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등지고 지구를 떠나기에 충분히 좋은 날씨였다. 나는 마지막을 만끽하고 싶은 듯이 산책로를 느린 걸음으로 걷다가 허벅지 근육이 저릴 정도로 속력을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달리니 무릎이 아팠고 바람이 목을 조르듯 숨이 가빠왔다. 맞아.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나를 없는 곳으로 내모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내가 지금껏 살아왔던 방식이었음을 새삼 깨닫고 말았다.


  혼자 달리면서 생각해봤다. 사람은 언제 지구에서 내리고 싶을까. 언제 이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행성을 떠나고 싶은 생각을 할까. 그건 내가 지독히도 외롭다고 느낄 때였다. 지구에서 단 한 사람도 내 편이 아니고 내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홀로 싸워야 될 것 같다고 느낄 때. 나는 그럴 때마다 지구를 떠나고 싶었다. 너무 슬프고 힘든데도 나는 내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지만 친구들이 나를 생각해주는 척하며 나를 실패자로 낙인찍을까 봐 그랬던 것도 있다. 그날은 지독히도 더 외로운 날이었다. 그래서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산책을 나온 지 30분 만에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밤공기가 너무 선선했고 풀들이 나를 따뜻하게 맞아줬으며 인적이 드문 산책로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가로등 불빛들이 다정하게 느껴져서였다. 사실 공부를 하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걸었던 적이 없다. 나는 그날 거의 2시간 30분을 걸었다. 휴대폰에 3만 보가 찍혔다.


  바람이 코끝을 건드려 나는 시원한 바람 냄새를 맡았다. 향긋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산책을 하면 화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것 같았는데 그건 정말이었다. 나는 갑자기 살아있어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이토록 죽고 싶다가도 특별한 이유 없이 살고 싶어 지기도 하구나. 사실 사람은 너무나 잘 살고 싶어서 너무나 죽고 싶은 게 아닐까? 누군가를 너무나 사랑하면 너무나 증오하게 되기도 한다. 걷다 보니 삶과 죽음은 대척점이 아니라 룸메이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을 망하면 지구를 떠나야지. 그렇게 생각했고 망친 걸 알았던 그날도. 밖이 너무 추워서 이대로 얼어 죽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 생각했던 그날도. 어떻게든 나는 살아있긴 했었다. 내가 있는 힘껏 죽음 버튼을 누르지 않는 이상 여전히 세상은 돌아갔다. 친구로부터 상사에게 깨졌다는 문자가 와있었고 여느 때처럼 우리 가족은 맛있는 된장찌개를 해서 먹었다. 내가 삶의 손을 놓지 않는 한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날 슬프게 했지만 어떤 날은 내게 용기를 주기도 했다.


  나는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작별인사를 하지 않은 주인공. 일단은 1막을 내리고  2막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무력감에서 헤어 나온 것도 아니었다. 1막이 끝나고 나는 아무도 없는 객석을 향해 외쳤다. 쉬는 시간입니다.  2막을 기대해주세요. 나는 잠시 목을 축일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다른 의미로 지구에서 하차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평균적인 지구인의 삶. 학교를 졸업해 바로 취직을 하고 돈을 벌며 결혼자금을 마련하고 집을 사기 위해 저축을 하는 삶. 나는 그런 일상에 잠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8개월간의 공백이 시작되었다. 누군가에겐 한심한 방황 생활이지만 나는 나를 찾아 길고도 짧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나라는 작고 처연한 우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나는 여행을 가기 위한 가방을 꾸렸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호리 다쓰오,《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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