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휘지 Sep 18. 2022

백수라 말할 수 있는 용기

4화. 모두들 되고 싶잖아요 돈 많은 백수 (2021. 11)

  아빠한테 시험을 접고 취업준비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으나 3년이고 4년이고 붙을 때까지 계속하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나는 항복하고 말았다. 지금껏 모범생에다가 아빠의 말에 거역하지 못하는 자녀로 살아온 나는 아빠한테 어떻게 내 의견을 피력해야 할지 몰랐다. 스물다섯 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살도 채 안된 강아지처럼 깨갱하며 뒷걸음질 치는 것이 전부였다. 아빠한테서 40만 원을 받아 공무원 인강을 새로 끊었다. 다음날 아침 독서실로 향했다. 울면서 수험서를 폈다. 하지만 공부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곳에서 마음이 떠난 지 오래였다.


  읽히지도 않는 수험서를 구석에 밀어 두고 나는 남들이 허송세월이라고 부를 만한 귀중한 시간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겨울이 시작되며 나는 독서실이 아닌 도서관을 자주 들락날락 거리며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수험서와는 동창회에서 만난 전 애인처럼 내외하게 되었다. 아빠는 내가 도서관에서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는 줄 아셨다.


  

  사람 냄새가 그윽한데도 침묵을 사랑하는 곳은 도서관 밖에 없다. 도서관을 둘러보는데 책을 읽는 사람을 찾는 게 정말 어려웠다. 모두 토익 문제를 풀거나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거나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신문에 푹 빠져 계셨다. 나는 어쩐지 그곳에서 처음으로 내가 이방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시험공부를 하고 문제집을 펼치고 있을 때 나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으며 소설가로 사는 인생에 대해 탐구하고 있었다. 공부를 손 놓고 보니 나는 영락없는 백수였고 한량이었다. 공시생이라는 딱지를 떼고 나자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수식어도 붙일 수 없었다. 백수라는 단어는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돈 없는 백수였기 때문이다. 돈 많은 백수라면 또 멋있었을 테지만.


  공무원 시험은 다 끝났는데 내게서 아무 소식이 없자 친구들은 내가 뭘 하고 지내는지 정말 궁금해했다. E는 시험이 끝났으니 한 번 얼굴 보자고 말했다. G는 내게 대체 요즘 뭐하고 지내냐고 물었다. 나는 “시험 떨어져서 지금 백수야. 놀아.”라고 말할 수 없었다. 너무 창피했다. 또 떨어졌어?라고 물을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맞아. 열심히 했는데 떨어졌네. 나는 머리가 안 좋은가? 사람들이 10시간 공부할 때 나는 20시간을 공부했어야 하나 봐. 나는 머릿속으로 또 자책 스위치를 켜버렸다. 나는 G에게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나? 요즘 숨 쉬는 중. 숨 쉬느라 많이 바빠.”

  G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웃었다.


  집에 돌아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만화를 봤다. <오소마츠 6 쌍둥이>(원제: 오소마츠 씨)인데 백수 6 쌍둥이가 나와 매일 빈둥빈둥 노는 내용을 담은 코믹한 만화였다. 분명 재작년에는 보면서 깔깔거렸는데 지금 보니 전혀 재밌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성우가 더빙을 했는데도 귀가 즐겁지 않았다. 나는 맥주나 홀짝홀짝 마시면서 화면에 두 눈을 고정시킨 채로 표정 없이 피식거렸다. 2화에는 ‘주먹밥들’이라는 AI 로봇이 나오는데 그 아이들이 아주 재밌는 대사를 날리자 나는 두 눈을 그제야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백수가 뭐가 어때서 그러는 거죠? 일을 하면 그만큼 위험이 따르는 법이죠.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요. 데이터에도 나와 있어요. 일찍이 인간은 자기 일을 줄이기 위해서 저희 같은 존재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 뒤로 기술은 점점 발전을 거듭해 많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죠. 아주 훌륭해요 그러니까 한심하다고 생각할 거 없어요. 백수라고 눈치 볼 필요도 없어요."


  나는 항상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시험 준비를 하기 전에 이 대사를 들었다면 조금 어처구니없어했을지도 모른다. 백수를 저렇게 아름답게 포장할 수도 있구나,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2년을 하얗게 불태우고 무기력에 시달리던 나는 저 말이 어쩐지 반갑게 느껴졌다. 일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돈이 많다면 생존을 위해 일할 필요는 없었다. ‘돈 많은 백수’라는 말은 들어도 들어도 짜릿한 말이었다. 나는 어쩐지 ‘돈 많은 백수’의 절반은 이룬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돈은 없었지만 나는 백수였다. 매일 아침 출근길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며 상사의 눈치를 볼 필요 없는 자랑스러운 백수였다.


  직장인 친구들을 만나도 나는 저 대사를 떠올리며 위축되지 않을 수 있었다. 내 상냥하고 다정한 친구들은 구태여 내가 시험에 세 번이나 떨어진 공시생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지 않았다. 나는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친구들의 직장 이야기를 들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그래. 역시 백수가 짱이라니까.”


  나는 돈도 없고 스스로를 책임질 여력도 당장은 없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돈 많은 백수가 되기 위해 직장에 들어가야 할 터였다. 그때는 이 자랑스러운 백수를 관둬야겠지만 언젠가는 다시 리뉴얼된 돈 많은 백수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내 생활은 백수생활 체험판이라고 생각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나 편해졌다. 나는 이토록 한가로운 생활을 잠시나마 즐기기로 했다. 체험판의 기한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전 04화 지구에서 하차하기 좋은 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