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웠던 여름이 어느새 뒤로 물러났다. 아침저녁으로는 공기가 차갑게 달라붙는다. 문을 열면 싸늘한 바람이 들어와 몸보다 마음이 먼저 움츠러든다. 여름 내내 내리쬐던 햇살이 그리워지지만, 그 뜨거움 속에서 버티던 나날들도 이제는 저 멀리로 사라지고 있다. 계절이 바뀌는 걸 보면 신기하다. 나는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세상은 스스로를 바꾸어 간다.
어제는 직원과 함께 피자를 먹었다. 별것 아닌 저녁이었다.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고, 치즈가 늘어나는 걸 보며 웃었다. 그런데 아침에 걸려온 전화는 목소리가 달랐다. 코맹맹이 소리, 잔기침, 그리고 “감기 걸렸어요.”라는 말. 링거를 맞으러 병원에 간다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건강하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묘하게 쓰였다. 사람의 몸도, 마음도 계절 따라 변하는 걸까. 그 따뜻하던 여름이 떠나자마자, 우리는 각자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집안을 둘러보면 여전히 정리가 덜 됐다. 옷가지며 책이며, 여름 내내 입던 반팔과 얇은 잠옷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괜히 한숨이 나온다. 손을 대야 하는데, 마음이 앞서지 않는다. 정리란 단순히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마음이 함께 움직여야 손도 따라 움직이는데, 요즘 내 마음은 제자리를 잃고 흔들린다.
곧 추석이다.
해마다 돌아오는 명절이지만, 올해는 왠지 다르게 느껴진다. 부모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명절 전엔 집도, 마음도, 다 정리해놔야지. 그래야 새 계절을 잘 맞이하지.”
그 말이 괜히 오늘따라 가슴에 닿는다. 어릴 때는 그저 잔소리처럼 들렸는데, 이제는 그 말이 얼마나 깊은 뜻이었는지 알겠다. 어질러진 것은 집안뿐 아니라 내 안의 생각들이기도 했다. 미뤄둔 일, 하지 못한 말, 놓지 못한 기억들. 그것들을 한켠에 쌓아두고 살아왔던 게 아닐까 싶다.
추석을 앞두고 납골당에도 다녀와야 한다. 차례상 차릴 생각보다, 그곳에 들러 조용히 인사드릴 생각이 먼저 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곳에 다녀오면, 마음 한켠이 조금은 차분해진다. 돌 위에 올려진 국화꽃 한 송이, 유리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늘 같은 생각을 한다.
“이렇게 또 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구나.”
살아 있다는 건, 어쩌면 계속 떠나보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도, 계절도, 마음도.
요즘은 ‘정리’라는 단어가 자주 머릿속을 맴돈다. 옷장을 정리하듯 마음을 정리하고 싶다. 버릴 것은 버리고, 남길 것은 곱게 개켜 두는 그런 일. 하지만 마음의 옷장에는 늘 미련이 걸려 있다. 쉽게 버리지 못하고, 차마 꺼내지 못한 감정들이 잔뜩 쌓여 있다. 그래도 이제는 조금씩 비워보려 한다. 그 빈자리에 새로운 계절의 바람이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을 열어보니,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커튼이 살짝 흔들리며 방 안 공기를 바꾼다. 그 속에 묘한 냄새가 섞여 있다. 마른 낙엽 냄새, 차가운 흙 냄새,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그리움의 냄새. 나는 잠시 그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코끝이 시리도록 차가웠지만, 마음은 오히려 따뜻했다.
“올가을엔 마음을 좀 단단히 다잡아야겠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본다.
누군가는 여름이 끝나면 허전하다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가을이 시작될 때 더 마음이 분주하다. 해야 할 일도, 마무리해야 할 감정도 많다. 하지만 그 분주함 속에서 삶의 온도를 느낀다. 사람은 결국 이렇게 살아가는 것 같다. 덜어내고, 채우고, 다시 덜어내면서 조금씩 나아가는 것.
오늘은 마음먹고 방 하나를 정리했다. 서랍 속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이 나왔다. 오래전 가족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웃는 얼굴들 사이에 어린 내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계절의 흐름을 몰랐고, 떠나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다. 사진을 바라보다가 문득 부모님이 그립고,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그 마음이 가슴을 콕 찔렀지만,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정리는 끝이 없고, 계절은 늘 앞서간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건, 서로의 안부와 마음 하나일지도 모른다. 감기에 걸린 직원에게 따뜻한 차를 전해주고, 납골당에서 조용히 인사드리고, 흩어진 옷가지들을 개켜두는 일. 이런 소소한 일들이 모여 우리의 일상을 단단히 붙잡아준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나는 조금 더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서늘한 공기 속에서 따뜻함을 찾으려는 마음, 그것이 아마 ‘살아있음’의 증거일 것이다.
오늘도 나는 창문을 닫으며 이렇게 다짐한다.
“그래, 올가을엔 마음을 먼저 정리하자. 그러면 삶도 조금은 단정해질 거야.”
그리고 그 말이 왠지 믿음직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