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거주하는 곳은 오사카 난바에서 전철을 이용하고 다시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높은 고지에 이르게 된다.
그때는 성지로만 여겨져 성지순례에 많은 관광객이 주 수입원이었다.
마을에는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있었다.
사찰이라고 하는 절이 52개로 기억된다.
물론 한국의 사찰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나의 숙박은 절이었고 나의 일본 거주지가 되었다.
절의 규모가 어찌나 큰지 동력을 이용한 연못이 몇 군데가 있었고 귀하다는 비단잉어를 원 없이 보았다.
훗날 나는 친구가 보고 싶거나 힘이 들 때 혹은 식구들이 보고 싶을 때는 비단잉어의 꼬리를 따라 자주 관찰하였던 기억이 난다.
행사나 주말에는 관광객이 전 사찰에 만석을 이루며 온 마을이 붐비기 시작한다.
한국절과 다른 점은 숙박비와 식대값은 각각 당연히 계산한다.
일본 사찰은 뭐든지 계산적으로 돈을 지불했다.
그 당시 우리는 절에 가면 밥도 먹고 숙박도 공짜로 먹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터치페이를 알게 되었다.
상당히 친하게 지내다가도 계산 때에는 당연히 1/N이었다.
일본의 주지스님들은 한국과 다른 점이 많았다.
한국의 승려생활은 결혼생활을 하던 사람은 식구들을 떠나 출가를 하게 된다.
소위 말해서 속세를 떠난다는 말을 하는데 일본승려는 결혼생활을 하면서 술 담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맥주 정도는 식사와 가볍게 하고 담배도 자연스레 피운다.
일본의 가라오케 문화는 이미 알려진 지 오래였다.
누구나 노래 잘하는 건 기본이었다.
물론 식사 때는 자연스레 맥주를 반주로 함께 마시곤 하였다.
그만큼 시간절제와 공과 사의 분명한 절제가 따랐다.
물론 전부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처음엔 어색하였던 문화라고 생각된다.
최근에 우리나라에도 승복을 입고 춤을 신나게 추는 스님을 보면 포교의 일환으로 이해가 된다.
시대에 맞는 포교라 생각하니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한국 절 생활에 비교적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나는 한국과 너무도 다른 생활에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일단 탁음 발음이 잘 안 되었다. 두 번 물으면 틀렸나 하고 다른 단어를 이야기하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되고
서로가 웃기도 한다. 그런 생활에 신기하게 바라보는 그들과 나는 친근한 라포가 형성되었다.
토플 시험을 준비하였던 나는 회화는 많이 부족했다.
굳이 말하자면 한국인에게 잘 안 되는 발음이 있었다.
구강 문제였을까?
지금 생각하니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주지 스님의 막둥이 귀여운 아끼꼬짱이 있었는데 한 6살 정도 유치원생이었다.
귀여운 인형 같은 아이가 애교도 많고 나랑 가장 회화가 잘 되는 아이였다.
내가 '쟈가이모'라는 발음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나 보다.
어느 날 친구들 몇 명 데리고 와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쟈가이모'라고 말해보라며 평상시와 같이 애교를 부린다.
무심코 따라 했던 발음을 듣고 친구들과 깔깔 웃는 것이었다.
어린아이가 보아도 발음이 이상했는지 그들만의 대화였다고 생각하니 나도 웃음이 난다.
이런 일은 귀여운 일이었다.
학교에 가니 학생들이 모두 1인 자가용으로 차를 멋지게 단장하여 놀라웠다.
나도 운전하고 싶었던 마음이 들기 시작하였다.
한국은 스틱기아였던 시절인데 모두가 오토여서 눈물의 언덕이란 단어는 없었다.
오토에 놓고 달리기만 하기에 한국의 스틱기아와 달리 여유 있게 운전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이라 3월경이었을까 많이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