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보다
꿈속에서 코끼리를 탄 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난 20대에 코끼리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꿈을 꾸었다.
코끼리는 원래 불교적인 상징이 깊었다.
원래 부모님은 불교적인 집안에서 일상에서의 많은 것을 종교적으로 접목시켰다.
난 기이한 꿈을 꾼 후 종교적인 일에 자연 몰두하게 된다.
원래 부모님의 봉사정신을 보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한창 사춘기에는 남자 관심보다는 오지랖 넓은 나는 남을 우선시하는 마음이 컸었다.
불교의 심취가 적성에 맞았을까?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난 인도철학에 조금 마음을 두고 산스크리티어 언어에 관심이 많았다.
인도에 공부하러 가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그 당시의 인도나라에 대한 물정은 정말 1도 모르고 이야기한 거 철부지였던 시절을 인정한다.
거대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물론 70년대에 종로 학원에서 일본어 공부한다고 열공생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일본어 선생님은 교환교수로 연세언어학당에서 능숙하게 말을 잘하였고 그 사람들과도 친밀한 시간으로 회화를 이어나갔다. 토플시험 본다고 열심히 밤새워 공부하던 기억이 난다.
일본어는 웃고 들어갔다가 울고 나온다는 말도 있었다.
타워호텔 근처에서 하루종일 안보교육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한국어로 된 신문은 절대 보면 안 된다'와 그 외에 조심하라는 안보교육 속에는 '안된다'가 많았다.
종로에서 하루종일 유학생들을 상대로 교육도 받았다.
교육이 끝난 후 지금이라도 외화가 많이 나가니 유학을 자제시키는 시간도 이어졌다.
아마도 오렌지족이라는 말이 나올 그즈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럭저럭 오사카의 고야산대학에 정식 입학을 하였다.
서류도 복잡하였다.
난 보증인과 서류제출에 많은 도움을 받아 어렵지 않게 입학을 하게 되었다.
시험에 합격하자 나를 지원해 주겠다는 독지가가 나타났다.
사회사업가에게 물려받은 학교 선배가 양자로 입적이 되었다.
아직도 기억하는데 쿠사나기라는 사회사업가가 좋은일에 앞장섰는데 자식이 없어서 학교출신중에서 양자를 택한 것이었다. 사회사업을 시작하였던 기회에 내가 당첨된 꼴이었다.
이유는 있었다.
불교문화가 한국을 통하여 들어왔기에 한국인에게 고맙다는 차원에서 장학금을 주겠다는 취지였다.
그 당시 모든 문화는 한국을 제외한 중국에서 직접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옥신각신 심포지엄도 열리곤 하였다.
그만큼 한국은 무시당하는 시절이었다.
얼마 전까지도 나의 모든 활동을 한 스크랩들을 보관하였지만 나의 아상을 지우려 모든 것을 없애버렸다.
미니몰 라이프를 선호하며 과거에 메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현세가 더 중요하다는 철학으로 모든 정리를 하고 나를 내려놓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