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하는 일상들
나는 일본에서 바나나를 실컷 먹었다. 한국에서 바나나가 귀하던 시절을 기억한다.
그때는 서울에서 남대문시장에 가야 비싼 바나나를 구경할 수 있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가장 즐거웠다. 길을 기웃거리며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종종 야채가게에 들러 가장 저렴한 바나나를 사 먹었다. 그때 같은 반 남학생이 야채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바나나 살 것을 미리 알고 저울에 올려놓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바나나는 싸고 배고플 때 먹기 좋은 과일이었지만, 내 자존심은 살짝 상했다. 그래서 홧김에 훨씬 비싼 멜론을 집어 들고 말았다.
절에서 멜론이 후식으로 나올 때마다 살살 녹는 맛을 좋아했지만, 멜론은 바나나보다 훨씬 비쌌다. 충동적으로 샀지만, 아무도 모르게 혼자 먹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방에 돌아와 멜론을 칼로 자르니 그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찼다. 혼자서 머리통만 한 멜론을 먹는 것은 큰 일이었고, 결국 음식물 쓰레기 처리까지 곤욕을 치러야 했다.
또한 일본에서는 아르바이트가 성행했다. 나 역시 학교 수업이 끝나면 절로 돌아와 절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절 생활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외출과 귀가 시 사무실에 아르바이트생들의 나무로 된 명패가 걸려있었다. 부재중에는 빨간색 이름이 보이게 돌아오면 검은색 이름이 보이게 뒤집어놓는다. 인사말을 꼭 해야 했고, 일본의 상냥한 인사말은 처음엔 낯설었지만 배울 점이 많았다. 길을 가다가도 서로 미안하다고 말하는 일본인들의 배려심에 감동을 받곤 했다. 뻣뻣한 나에게도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인사말을 하게 되었다.
내가 있던 절에는 12명의 아르바이트생이 있었고, 나는 유일한 여자였다. 주로 주방에서 일을 했으며, 나이 많은 오버짱들이 상주하였고 상당한 친절과 나를 많이 챙겨주었다. 많은 손님들에게 사찰 정찬 요리를 제공하는 일을 도왔다. 식기 건조기를 처음 봤을 때 신기했고, 튀김 요리는 내 담당이었다. 요리를 타이머에 맞춰 넣고 꺼내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연근과 가지, 깻잎 튀김은 특히 맛있었다. 절에서의 일상은 단순하지만, 그 속에서 배운 것들이 많았고, 지금도 가끔 집에서 일본 요리를 해 먹으며 그때를 떠올리곤 한다.
이 이야기는 나의 어린 시절부터 일본에서의 생활까지 이어지는 소소한 일상의 추억들이다. 그 속에서 느꼈던 작은 감정들과 경험들은 지금까지도 내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