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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은 Mar 28. 2021

베개와 조카, 그리고 사랑이란

내가 몇 년 전 나름 큰돈을  주고 나 스스로를 위해 한 첫 투자는 베개이다. 그때는 비싸서 날 꽤 괴롭혔지만 몇 년이 흘러 내 목과 내 머리를 편안하게 해주고 있다. 혹여 내가 안 좋은 꿈이라도 꾸진 않을까, 마음 졸이며 늘 좋은 꿈만 꾸기를 바라는 베개의 마음. 나는 이제 내 배게가 없으면 잘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베개에 베고 누워서 생각한다.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초심 그대로 살아가는 게 어려울 때가 많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부딪혀서 오는 것들, 특히 감정들 때문에 지치고 힘이 든다. 처음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텐데. 상대방도 그렇듯이. 초심은 참 장난꾸러기 인양 자주 제 모습을 감추고 우린 어느새 그 초심을 놓쳐버리고 우리가 의도치 않던 말들은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날아가 그의 영혼에 닿는다. 상대방의 말들 또한 그렇게  날아와 내 영혼에 닿는다. 사람은 손가락을 베면 피가 흘러나온다. 우리는 지혈을 하고 상처를 돌본다. 그리고 우리 몸 또한 스스로 낫도록 그런 능력이 있다. 진부한 말일지 몰라도. 하지만 우리 영혼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떨까?  


2살이 조금 넘은 내 조카는 어느 날 언니에게 “안아 안아” 그러며 그녀를 간절히 뚫어져라 쳐다본다. 몇 달 전에는 작고 짧은 자신의 양 팔을 활짝 벌리곤 상대방에게 안아달라고 떼를 쓰듯 우는 소리를 내었다. 한 달 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양팔을 벌리면 자세를 제대로 제대로 잡을 시간도 주지 않고 조카는 아무리 멀리에 있더라도 까르르 소리를 지르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데 할아버지 할머니는 되레 겁에 질린다고 한다. 그런 아이가 이제는 엄마를 쳐다보며 자신을 안아 안아 (아마도 나를 안아주세요 라는 말) 두세 번 말하고는 조용히 쳐다본다. 


아이는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히 자신을 안아달라 말도 제대로 못 해서 "안아"라고 밖에 못한다. 아니, 말을 하지 못했을 때는 온몸을 이용해 때로는 떼를 쓰며 자신을 안아달라고 한다. 만약 언니가 이 아이를 안아주지 않았다면 그래도 그 아이는 계속 안아달라고 했을 거? 한두 번이 아니아 계속 안아주지 않으면 아이는 아마 어느 순간 그만둘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아무리 양팔을 벌리고 벌려도 그저 가만히 있고 혹 안아라는 말을 할 줄 알게 되어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기에. 어린아이도 안다. 자신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중요한 건 어린아이는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그렇게 분류하는 듯하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해, 저 사람은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아. 2살도 안된 내 조카는 분명 그것을 자신의 육감처럼 잘 안다. 나를 보는 저 사람의 눈빛, 말투 그리고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에게는 멈추지 않고 무섭게 달려간다.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은 마치 자신과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난 관심 없어!" 이러고는 말이다. 


최근에 언니랑 영상통화를 하는데 언니가 속상한 일을 겪었는지 내가 겪었는데 동생이 겪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세 자매는 누구한테 일어났건 속상한 일이 일어나면 다 같이 속상해하고 때론 분노하며 대화한다. 이날도 셋 중 한 명을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침까지 튀기며 서로 말도 겹치면서 열띤 토론을 하는데 어디선가 조카가 나타나서 갑자기 자신의 엄마를 꼭 안아주는 게 아닌가. 우리는 모두 당황해서 순간 얼음이 되었다. 뭐지? 그러고는 깨달았다. 우리가 격양된 목소리로 화난 듯 이야기하자 아이는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았어도 그런 엄마를 옆에서 지켜보다가 와서 껴안아준 것이다. 그 행동의 이유는 무엇일까? 두 살 조금 넘은 아이가 엄마를 위로해주기 위해서 라면 난 벌써부터 효녀 같은 내 조카를 대견히 여길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행동의 이유가 사실을 자신이 사랑받기 위해서라면? 아이는 어떤 이유에서 자신을 평소 사랑해주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누군가의 평소와 다른 화가 난 모습을 본다. 그 아이의 작은 머리로 자신의 인생 경험을 총동원해 고민할까? 어떻게 해야 가장 좋을까? 내게 피해가 안 오고 처리할까? 그런 생각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엄마가 나를 계속 사랑하게 만들려면 가서 엄마를 안아주면 되겠다. 나를 안아줄 때면 항상 웃는 얼굴과 따뜻한 말투, 즉 나를 사랑해주니까. 


조카를 보면 참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저 자신이 사랑받는 일에 당당한. 당당하게 사랑을 요구하는. 왜냐면 자신을 사랑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어느 순간 어른이 되어 나는 내가 사랑받는 일에 소극적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두려움이 생겼다. 혹시라도 내가 그랬는데 날 외면하면 어쩌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많은 경우 당신 잘못이 아니다) 그냥 그랬을수도 있고 그 사람의 하루가 힘들어서 그냥 단순히 짜증이 나서 질투가 나서 이유는 수백수천 가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내가 혹시라도 잘못한 일에 대해 내 브레인 파워를 총동원해 내 기억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그리고 괴롭고 불안한 마음이 스스로에 대한 자책 혹은 분노로 이어진다. 혹은 그 사람에게 이어 인다. 이때 내 조카를 떠올리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이모, 왜 그런 생각 등을 하며 불필요한 이모 에너지를 소모해? 나처럼 그냥 날 사랑해주는 엄마를 꼭 안아주면 되지 않아? 그러면 엄마도 날 항상 꼭 안아주고 사랑해준다고! 헤헷"


사랑받는 것이 좀 부끄럽고, 어색하고, 혹은 너무 오래되어서 무슨 느낌인지 잊어버릴 수도 있다. 혹은 상처를 받어서 두려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분명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항상 있다. 두 살 조금 넘은 내 조카를 보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 사랑이란 것을 원하고 갈구하며 태어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의 말, 눈빛, 터치 등에 굉장히 민감하다. 그래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 생각이 들면 괜히 속상하다. 분명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날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엔 분명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적어도 나 스스로는 나를 안아줄 수 있지 않을까? 


어린 조카가 작은 몸으로 있는 힘껏 달려와 내 양팔에 안기는 느낌 울 상상해본다. 내가 준비도 덜 되었는데도 그냥 무작정 까르르 웃으며 나에게 달려드는 내 조카. 때론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안아달라고 떼쓰기도 하고 또 때론 나를 간절히 쳐다보며 “안아 안아” 하고 말하는 내 어린 조카에서 내 어린 모습이 보인다. 사랑해달라고 당당히 말하는. 나는 내 조카와 함께 내 어린 나를 꼭 안아주고 싶다 아주 오랫동안 꼭. 나 또한 너를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이다.


다시 내 베개로 돌아오면 그렇게 연습을 한 탓일까? 난 내 베개에게 말했다 "베개야, 오늘 밤도 내가 내 머리와 몸을 너에게 맡길게. 너를 사랑하니까. 그러니 너도 내가 자는 동안 나를 꼭 껴안아 혹시 모를 악몽에서 나를 지켜주겠니?" 나는 그렇게 당당히 베개에게 말하며 오늘도 편한 마음으로 행복한 꿈나라로 행한다. 베개를 사랑하며 나를 사랑하는 베개의 폭신함을 가득 느끼며.


음악: All I ask of you. Phantom of the Op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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