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짧게 배운 피아노 실력으로 내가 잘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은 쉬운 가곡 반주곡들이전부였다. 반주 코드도 단순하고 무엇보다 부모님께서 좋아하셔서 나도 즐겨 연주하곤 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집에 있던 고동색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우리 집에서 내가 유일했다. 나는 주로 아침을 먹고 난 뒤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러면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시는 엄마가 어느새 설거지를 마치시고 피아노 옆에 오셔서 노래를 부르시곤 하셨다. 엄마는 참 맑고 고운 목소리를 지니셨는데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마치 산속의 샛소리가 떠올랐다. 엄마는 좋아하는 가곡들을 한두곡 부르시고 나면 가끔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시던 외할아버지께서 풍금을 연주하시면 엄마는 그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셨다고 하셨다. 엄마는 특히 '얼굴'이라는 곡을 부르실 때마다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하시곤 했는데 엄마의 두 눈엔 슬픔보다는 깊은 그리움이 가득했다. 그럴 때면 나는 말없이 한번 더 그 곡을 연주했다. 엄마의 그리움이 조금이나마 하늘나라에 계신 할아버지께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가끔씩 아빠와 할머니도 엄마와 함께 좋아하시는 가곡들을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부르시곤 하셨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 집 아침은 피아노 연주와 노랫소리로 가득했다.한곡을 끝내고 나면 앙코르 요청이 들어왔다. 각자 좋아하는 가곡들을 한 번씩 부르고 나야 만 나도 피아노 반주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감질나게 한두 곡으로는 노래를 좋아하시는 엄마와 아빠와 할머니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항상 대여섯 곡은 기본이었다. 가끔 내가 치고 싶은 곡이 아니라 순전히 노래의 반주를 위해 쳐야 할 때는 솔직히 조금 심통도 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피아노를 치다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열심히 노래를 부르시는 부모님과 할머니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곤 했다. 이따금씩 내가 실수를 하면 도중에 노래를 잠깐씩 멈추셔야 했지만 모두들 생색한 번 내지 않으셨다. 그저 두 손을 살포시 맞잡고 발그레한 두 볼로 정성스레 노래를 부르시는 모습들이 마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 행복해 보였다.
희한한 기분이었다. 마치 내가 선생님이 된 듯하고 엄마 아빠와 할머니가 마치 아이들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의 피아노 반주에 두 손을 맞잡고 발그레한 두 볼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열심히 열창을 하는 아이들. 기분이 묘했다. 나의 비실한 연주 실력으로 이렇게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노래를 마치고 나서 해맑게 웃던 얼굴들을 보면서 항상 생각했었다.
'조금 더 열심히 피아노 공부를 할걸. 그럼 더 잘 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더 자주 피아노 반주를 해드릴걸.'
시간이 흘러 이제는 반주를 해드리고 싶어도 너무 멀리 떨어져 살게 되면서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없게 되었기 때문에.
아... 시간은 왜 항상 흐르고 난 뒤 붙잡고 싶어 지는 것일까? 왜 그때 더 잘하지 못했던 것일까? 조금 덜 심통 부리고 한곡이라도 더 연주해드리지 못했을까... 지나간 시간에 후회가 가득 밀려왔다. 괜히 서글퍼졌다. 어둠이 내려앉은 길가의 반짝이는 희미한 불빛들이 흐릿해 보였다.
그 순간 다 같이 즐겨 부르던 가곡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모닥불 - 박인희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늦은 밤 아무도 없는 고요한 거리를 바라보며 이 노래 가사를 곱씹어 보았다. 모닥불은 내게도 여러 추억들을 불러일으켰다. 어릴 때 친구들과의 캠핑 추억. 가족과 함께 산으로 바다로 떠났던 여행들. 항상 모닥불을 앞에 두고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평소 하지 못했던 말들, 미처 전해지 못했던 말들, 마음속에 간직했던 말들을 조심스레 꺼내보곤했다. 그중에는 간질거리는 말들도 있었고 무거운 말들도 있었다.
모닥불은 신비로운 존재임에 분명했다. 어둠 속에서 벌겋게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의 현란한 춤사위를 보고 있자면 무슨 최면에라도 걸린 듯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말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도 하고 호탕한 웃음들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왠지 모닥불 앞에서 말하면 어떤 이야기라도 그 순간에 타오르고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그렇기에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는 어떤 용기가 주어지지 않았던가 싶다. 지금 이 순간 상대방에게 내 솔직한 마음을 꼭 전해야만 한다는 간절함도 함께 말이다.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붙잡으려 하지 말고 지금 바로 내 마음을 전해야겠다. 내게 시간과 기회가 주어졌을 때 미루지 말고 전해야 한다. 나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상대방에게 전달이 될 수 있으니까.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 그 사람에게 전달이 되도록.
서둘러 부모님과 할머니께 문자를 보냈다. 귀여운 이모티콘들도 함께 보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한결 잔잔해졌다. 나는 아직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서투르다. 쑥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하니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긴 하다. 순간의 쑥스러움만 참고 넘기면 그다음에는 더 쉬워지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함께 모닥불 앞에 마주 앉아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더 늦기 전에 솔직한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게끔. 세네카는 말했다.
인생은 짧은 이야기와 같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이가 아니라 값어치다 - 세네카
우리들의 인생, 우리들의 이야기에는 끝이 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 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며 매일을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훗날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슬픔이 아닌, 후회가 아닌, 깊은 그리움과 따뜻한 미소로 추억들을 반길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