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 선반과 고구마 한 조각

오늘의 책: 김유진의 <나의 하루는 새벽 4시 30분에 시작된다>

by 이제은

우리 집 발코니에는 검은 티브이 선반이 자리 잡고 있다. 집안에 딱히 있을 곳이 없어진 선반은 발코니에 내다 놓으면 왠지 제격일 것 같았다. 해가 지고 선선해진 하루의 끝에 노을과 야경을 앉아서 바라보면 참 좋을 듯싶었다. 처음 한 달 동안 가끔 날씨가 좋은 날에는 선반에 앉아 시원한 밤공기도 들이마시고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도록 기분 전환을 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이 선반은 딱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것이었어. 흠흠' 나는 혼자 흐뭇해하며 조그맣게 반짝반짝거리는 야경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다만 내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은 꼭대기층 발코니는 하늘로 뻥 뚫려있다는 것이었다. 비와 눈을 고스란히 다 맞은 선반은 점점 변해갔다. 한번 젖기 시작한 선반에 앉는 것이 찜찜해졌고 날이 추워지면서 자연스럽게 발코니에 나가는 일도 줄어들었다. 따뜻한 집안에서 발코니를 바라볼 때마다 외로워 보이는 선반이 마음에 걸렸다. 검은색의 얇은 나무로 된 선반이 그동안 내리던 비와 눈들을 한껏 맞아서 윗판이 비틀어진 모습은 짠하게 느껴졌다. 저 상태로 또 몇 개월 놓아두었다가는 안될 듯싶었지만 막상 발코니 창문을 열면 항상 핑계가 생기곤 했다.


"지금은 퇴근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을 거야."

"지금은 너무 이른 시간이라 큰 소리를 내면 곤란해."


오늘 아침에도 그렇다. 날이 화창해서 창문을 열고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서늘한 바람의 냄새를 맡는데 아니나 다를까, 검은 선반이 또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왠지 그러면 선반의 존재가 조용히 사라질 듯싶었다. 내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선반 또한 조용히 사라질 듯싶었다. 나는 서둘러 바깥공기를 즐기는 것을 멈추고 재빨리 창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리곤 부엌으로 가서 고구마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자주색 고구마들은 내 팔꿈치만큼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크기였다. 나는 흐르는 차가운 물에 고구마들을 깨끗이 닦아낸 뒤 물기를 닦아내었다. 나무 도마에 하나씩 올려서 조심스럽게 1cm의 두께로 썰기 시작했다.


우숙, 우숙, 우숙, 우숙.


생고구마들은 재밌는 소리들을 내며 둥그런 모양들로 재 탄생했다. 자주색 테두리에 안은 옅은 노란색이었다. 그 노란색은 마치 아기 병아리들의 털 같이 고운 노란색이었다. 이렇게 보들보들 예쁜 노란색이 껍질 속에 숨어있었다니! 항상 그렇지만 요리를 하다 보면 새삼스레 신기하고 재밌는 것들이 많다.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작은 것들 속에 꼭 누군가 선물들을 감추어놓은 듯 작은 신비로움들과 재미들이 꼭꼭 숨겨져 있다. 이 고구마들만 해도 겉보기에는 투박해 보이고 언뜻 무뚝뚝해 보여도 안은 보들보들 고운 심성을 가진 것처럼.


나는 일정하게 썰어진 고구마들을 에어프라이어 안에 차곡차곡 쌓았다. 성을 쌓듯이 한층 한층 쌓은 뒤 타이머와 온도를 맞추고 에어프라이어를 작동시켰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끝남 셈이었다. 나머지는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스트레칭이나 할까 하고 거실에 와서 앉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창문 밖의 티브이 선반이 고개를 내밀며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나는 다시 한번 선반의 시선을 회피한 뒤 김유진 작가의 <나의 하루는 새벽 4시 30분에 시작된다> 오디오북을 들으며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몇 개월 전 이미 한번 읽었던 책을 작가의 목소리로 직접 들으니 한결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다. 5, 4, 3, 2, 1, 땡. 4시 30분에 알람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5초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그 5초 안에 알람을 끄고 눈을 비벼서라도 일어나는 게 나만의 규칙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데는 생각보다 특별한 비법이 없다.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눈을 떠서 몸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 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된다, 김유진 >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라는 부분이 유난히 머릿속에 맴돌았다. 요새 나는 참 생각이 많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려면 꼭 생각을 먼저 했다.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이로울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기가 막히게 핑계들을 찾아내어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미루곤 했다. 단지 아침 기상뿐만 아니라 일과 집안일, 운동 등이 모두 포함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순간 스트레칭을 하다가 마음이 뜨끔했다. 나는 곁눈질로 아직도 창밖에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듯한 티브이 선반을 쳐다보았다. 강한 오후 햇살 아래 비와 눈으로 바래고 바랜 검은 표면이 홀쭉해 보였다. 처음에 샀을 때의 심플하고 모던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선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소중하게 잘 쓰지 못해서 미안했고 발코니에 방치해놓고 이리 홀쭉해질 때까지 놓아둔 것이 미안했다. 선반의 값어치를 떠나 내가 산 물건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못해서 또 한 번 마음이 뜨끔했다.


많은 일들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 < 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된다, 김유진 >


작가의 말대로 많은 일들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었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내일 하자.' '나중에 시간이 나면 꼭 해야지!' '지금 안 해도 괜찮아. 일단 티브이 좀 보고 좀 쉬자~' 많은 경우 귀찮아서 미룬 적이 많았고 또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에 회피한 적도 많았다. 어른이 돼서 좋은 점은 누군가 검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그 일을 했던지 안 했던지 그 사실을 확인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그나마 가끔 건강에 관련된 일들 (식단, 운동)은 부모님이 궁금해라도 하시지만 나머지는 순전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모든 주도권은 내게 있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자유에 따라오는 막중한 책임 또한 순전히 내 몫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진정한 어른의 자세임을 깨달았다.


'그래. 나는 진정한 어른이다. 내 인생의 주도권을 가진 당당한 어른이고 더 이상의 회피는 선택이 아니다.'


나는 스트레칭을 하다 말고 벌떡 일어나 발코니로 나갔다. 그리고 홀쭉해진 검은 티브이 선반을 번쩍 들어 올려 그 길로 곧장 아파트 지하실로 향했다. 한적한 오후라 그런지 복도와 엘리베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하실 문을 열자 큰 주차장이 나왔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문 왼쪽으로 다른 가구들이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서랍장도 있었고 의자들도 있었다. 나는 그것들 옆에 검은 티브이 선반을 살포시 내려놓고 지하실을 나왔다. 그리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들이 참 많구나. 마음을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구나. 그리고 마음을 먹었을 때 바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 작은 성장의 시작이겠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는데 순간 마스크를 뚫고 기분 좋은 달콤한 냄새가 코끝으로 간질였다. '응? 이게 무슨 냄새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부엌으로 가보니 조리가 끝난 에어프라이어에 불이 반짝반짝 들어오고 있었다. '오! 고구마가 다 되었구나!' 들뜬 마음으로 천천히 에어프라이어를 열어보니 더 강렬한 달콤한 냄새와 함께 먹음직스럽게 익은 둥그런 고구마 조각들이 옹기종기 놓여있었다.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맛있는 고구마들.


고구마 조각을 하나 집어 베어 무니 겉은 바삭바삭하면서 안은 촉촉했고 고구마 무스처럼 부드럽게 씹혔다. 바삭한 껍질도 씹는 맛의 재미를 더했다. 고온에서 구워져서 그런지 고구마의 달달함이 한껏 올라왔다. 나는 마지막 한입까지 꿀꺽 삼켰다. 의도치 않게 맛있는 고구마로 그동안 미루던 일을 잘 마무리한 보상을 받은 듯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피곤함을 무릅쓰고 일찍 일어났다는 것이지 그 시간에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느냐가 아니다. 새벽 기상을 통해 생활 습관이 달라지면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아무 이유 없이 실천한 사소한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나 자신이 훨씬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직접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습관을 바꾸면 추구하는 가치가 달라질 뿐만 아니라 주어지는 기회도 달라진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꿈, 목표, 동기, 꾸준함 역시 함께 따라온다. - < 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된다, 김유진 >


티브이 선반을 보내주었더니 탁 틔어진 발코니.



나 또한 "습관을 바꾸면 추구하는 가치가 달라질 뿐만 아니라 주어지는 기회도" 달라질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때로는 피곤하거나 귀찮아서 미루고 묻어놓았던 일들. 때로는 낯설거나 두려워서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일들. 그 일들을 한 번에 하나씩, 하나씩 해본다면, 해내 본다면 분명 습관은 바뀌지 않을까? 그 행동이 아무리 사소할 지라도 그 작은 실천들 속에 담긴 용기와 열정이 우리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조금씩 성장시킨다.


그렇다. 어쩌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은 실천들로 나아지는 일상 속 우리들의 성장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사소한 행동이라도 해내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나 스스로는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떳떳하고 당당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나 스스로를 더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게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항상 스스로에게 작은 보상을 주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해야지. 그것이 달달한 고구마 한 조각 일지라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