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는 것은 무(無) 조건 사랑

by 이제은
단 한 번의 만남으로도 그의 불꽃같은 영혼은 내 안의 무의미한 것들을 불태워 버리고도 남았다 - <지구별 여행자, 류시화 > 중에서


글을 읽는 것은

배가 고플 때 좋아하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


글을 읽는 것은

꾹 참았던 눈물을 마음껏 왈칵 흘리는 것.


글을 읽는 것은

남몰래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글을 읽는 것은

내 마음속으로 누군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


글을 읽는 것은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조용히 쓰다듬어 주는 것.


글을 읽는 것은

또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것.


글을 읽는 것은

삶의 시련과 고난을 받아들이고 용기를 내는 것.


글을 읽는 것은

내가 나를 놓아주고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래서 내가 새로운 나를 만나고

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글을 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글을 읽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쓰는 즐거움과 기쁨만큼 글을 읽는 데서 오는 깨달음과 감동이 일상에 지치고 메마른 마음을 휘감을 때 때로는 황홀한 카타르시스를, 때로는 잔잔한 마음의 평화와 여유를 느낍니다. 그런 면에서 글을 읽는 행위는 명상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내 안을 들여다보는 일종의 수련 같다고나 할까요.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바라보고 알아채는 연습이지요. 그렇게 연습하다 보면 어느새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감정들과 말들 밑으로 감추어진 진짜 의도를 정확히 읽어내는 힘. 우리는 모르지만 매일 꾸준히 글을 쓰면서 이런 힘을 길러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힘은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특히 숙제같이 어려운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의 진짜 속마음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면 엄청난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어쩌면 저만의 희망사항일지도 모르겠네요. ^^


저는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다시 글을 읽기 시작하고 또 쓰기 시작하면서 알게 모르게 예전보다 한 뼘 더 성장한 듯합니다. 전에는 저만의 방식이나 생각만이 옳다고 강하게 믿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을 포함 해 주위 사람들이 저와 다른 방식이나 생각들을 말했을 때 저는 항상 맞서 싸우려는 태도를 보였던 것 같습니다. 쉽게 화를 내고 속상해하고 마음의 문을 자주 걸어 잠갔지요.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화가 나고 속상했던 것인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말이죠. 마치 철없는 아이가 떼를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던 것 같네요. '내 말이 무조건 옳고 너는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줘야 해!' 저는 몰랐지만 그런 저의 태도가 어느새 제 주위 사람들이 제 눈치를 보게끔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미안한 마음과 함께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많은 경우 저를 위해서 한 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들이 제가 듣고 싶었던 달달하고 부드러운 말들이 아니라 쓰고 딱딱하고 때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주하기 힘든 말들이었기에 저는 그 말들을 외면했습니다. 마치 귀를 막고 눈을 감으면 그 말들뿐만 아니라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 또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수록 마음은 더 굳게 닫히고 메말라져 갔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이 두려워지게 되었습니다. 혹여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할까 봐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속으로는 이러면 안 되는데, 멈춰야 하는데 생각했지만 생각처럼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디서 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에 겁이 나고 당황했습니다. 막막했습니다. 변하고는 싶은데 그러질 못해 혼자서 끙끙 앓았습니다. 그러다가 솔직하게 먼저 가족들과 대화를 해보며 나름 안전한 곳에서 연습을 해보았습니다. 예전처럼 불쑥불쑥 감정이 올라오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예전만큼 마음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혼자 버텨내야 돼!'라는 강박관념이라는 사슬이 서서히 풀리며 '그래도 괜찮아.'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더 자주 해주게 되었습니다.


저를 있는 그래도 받아들여주고 제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들까지 감싸주며 나아가 제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쓴 진실들을 용기 내서 말해주었던 가족들과 친구들 덕분에 저는 천천히 변화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 완벽히 순탄한 길이 아니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 하나하나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동안 제가 받은 무(無) 조건 사랑을 통해 제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제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들까지 감싸 안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갈길이 한참 멀었지만 저는 그런 제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대견합니다. 예전의 저라면 이런 말은 부끄럽고 창피해서 절대 하지 못했을 말이지만 이제는 용기 내서 해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온전히 제 스스로를 위해서 말이지요.


내가 부족한 점들을 받아들이는 것 (특히 누군가의 말을 통해)은 아직도 어렵고 속상하고 힘든 일이지만 그 순간만 꾹 참고 버티고 나서 나중에 되돌아보면 참 잘했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돈 주고도 얻지 못하는 조언 들일 수도 있으니까요. 모든 조언들이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조언들은 새겨 담아 들으면 약이 됩니다. 내가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약. 다른 약들은 싫어도 이 약은 꾸준히 챙겨보려 합니다.


제가 이렇게 글로 저의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된 큰 계기는 며칠 전 오랜 친구와의 다툼이었습니다. 사실 시간상 오래 알았지만 깊게 마음을 터놓고 솔직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습니다. 친구의 친구로 알게 되어 알고 지낸 친구였습니다. 딱히 부닥칠 일도 없고 얼굴 붉힐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며칠 전 크게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가 원하는 방식과 생각이 제가 원하는 방식과 생각과 너무도 달랐던 것이죠. 한동안 누구의 방식과 생각이 옳은지 또 왜 옳지 않은지에 대해 날카로운 언쟁이 이어졌습니다. 어느덧 격해진 감정에 묵었던 서운했고 속상했던 일들이 하나하나 도마 위로 내던져졌고 그 일들은 마치 생명을 가진 듯 펄쩍펄쩍 몸부림쳤습니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고조된 대화 중간에 바라본 친구의 얼굴 속에서 문득 상처 받은 친구의 마음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상처 받은 제 마음도 보였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우리 둘 다 상처 받아서, 아프고 속상하고 괴로워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는 것이구나.' 이 다툼의 중심에는 그동안 쌓였던 서운한 마음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저는 태풍의 눈에 발을 디딘 것처럼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제 가족들과 친구들과 연습했던 수많은 대화들이 빠르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이 대화 또한 본질은 결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바로 마음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 대화가 예전에 연습했던 대화들과 다른 점은 이번에는 제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제 가족들과 친구들이 저를 믿고 다가와준 것처럼 저도 이 친구를 믿고 먼저 다가가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저는 누군가 먼저 다가와주기만을 바라는 그 간절한 마음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선을 바꾸어 그 친구가 했던 말들을 되짚어보니 역시 제 생각대로 예전의 제가 했던 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겁이 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에게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 보았습니다. 제가 알게 모르게 주었던 상처들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을 하며 그동안 제 마음에 쌓였던 서운함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반사적으로 저는 속으로 아차 싶었지만 그것도 잠시, 제 마음에는 형언할 수 없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제 앞에는 친구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 불안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 걸어 나갔겠지만 이번에는 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친구를 기다렸습니다. 예전의 제가 그랬듯, 이 친구도 분명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여는 데에는 또 마음을 받는 데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얼마간의 침묵 뒤에 저희의 대화는 이어졌습니다. 거센 파도가 지나가고 한결 잔잔히 가라앉은 대화였습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지쳐있던 저희는 대화를 마무리하고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무언가 완벽히 해결되지 않은 듯 해 마음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걸린 듯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헤어지기 직전 저는 친구를 향해 손을 뻗었습니다. 친구는 망설이며 자신의 두 손을 가슴 가까이 가져갔습니다. 저는 포기하지 않고 친구에게 손을 뻗고 친구의 두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마치 친구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손을 뻗어 제 손을 잡았습니다. 그 순간 친구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제 손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고 저도 친구도 몸의 긴장이 스르륵 풀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러자 얼굴의 긴장도 풀리며 저희는 서로 미소를 지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니어 보이는 친구와의 작은 다툼을 통해 저는 성장한 제 스스로와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을 여는 방법을 몰라 발만 동동 굴리며 누군가 다가와주기만을 기다리던 어린아이에서 이젠 먼저 용기를 내어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다가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어른이 되어 가는 스스로를 말이죠. 가장 놀라운 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더 행복해지기 위해 제 스스로 계속해서 변화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지요. 마음을 열고 말이에요. 마음을 열었을 때 보이는 모든 것들, 가능한 모든 것들,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정말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경이롭고 신비롭기까지 하지요. 한번 경험하면 다신 잊을 수 없는,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그런 경험이지요.


이 글이 예전에 제가 썼던 글 '대화'에서 다루었던 내용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을 보니 결국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예전의 글과 이 글과 연결된 것처럼, 예전의 저와 지금의 저도 연결되어 있고, 저와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함께 연결을 맺고 서로 배우고 가르쳐주며 함께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리의 만남이 우리 안의 모든 무의미함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서로의 영혼을 어루만져줄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열심히 읽고 쓰며 마음을 여는 연습으로 하루를 시작해 봄이 어떨까요? :)




커버 이미지: Photo by Melissa Askew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