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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은 Mar 27. 2021

손목시계

대학 입학 선물로 S가 나와 J에게 각각 손목시계를 선물해주었다. 부드러운 로즈골드 색과 손목에 차면 피부에 닿을 때 느껴지는 금속 특유의 차가움 그리고 곧이어 느껴지는 어느 정도 적당히 묵직한 기분 좋은 느낌이 드는 손목시계였다. 나는 이 손목시계를 내 작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아침에 일어나면 차고 나가서 밤늦게 되면 씻기 전에 다시 책상 위에 풀어놓고 하곤 했다. 어느 날부터였는지 모르지만 어느새 습관이 된 것일까? 왠지 없으면 허전한, 그래서 마치 내 하루가 불완전하다는 불안감이 들었던 날들도 많고 아주 중요한 발표나 행사가 있으면 이 시계를 안차면 뭔가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도 잘 안될 것 같다는 나 스스로의 징크스도 생겼다. 그래서 가끔은 내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더라도 나는 이 징크스를 피하기 위해 열심히 손목시계를 찾다. 어떻게 보면 이 시계는  만화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적을 무찌르고 자신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 꼭 착용하는 절대 없어어서는 안될 필수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느 날은 가족들과 함께 아침을 먹는데, 아마도 주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날도 손목시계를 차고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1 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무슨 일이 있던 어디에 가던지, 집에 있던지 항상 그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 온 S가 말했다. “너 그 손목시계 아직도 하고 다니는구나?” 그 말에 나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자랑스럽게 내 손목을 가족들 눈 앞에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응. 난 매일 이 손목시계를 차는걸?” 그러자 같이 밥을 먹던 가족들은 약간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며 다들 각자 나름대로 나의 손목시계 습관에 대해 피드백을 주었다. 그 피드백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나는 매일 이 손목시계를 찬다. 둘째, 나는 매일 이 손목시계만 찬다 였다. 특히 엄마의 간절한 피드백은 많은 경우 내 손목시계가 나의 드레스코드/옷차림/그날의 룩에 맞지 않아도 내가 그 손목시계를 찬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나는 패션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별로 없었다. 엄마랑 쇼핑을 갈 때에는 심지어 책을 들고 다니며 마치 내가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벨인 듯 조금 많이 오버하면서 책을 읽으며 돌아다닌 적도 있는데 그때 딱 한번 나를 억지로 자신의 쇼핑에 데려온 엄마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지금도 그 얘기를 하면 엄마는 뒷목을 잡으신다. 하지만 이젠 내 성질머리를 제대로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저 재밌는 해프닝으로 넘어가신다. 


다시 손목시계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때 엄마가 왜 그토록 나의 손목시계 습관에 대해 남다른 격한 관심을 보이 신지 이해가 조금은 된다. 지금은 그 금속 손목시계가 하늘하늘 거리는 드레스와 여름 구두에도 어울리지 않았고 등산에 가려고 입은 옷과 모자, 운동화에도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외에도 많은 경우 그 손목시계보다 나은, 혹은 아예 안 찼을 때 더 좋은 outlook을 완성시켰을 것이라 인정하고 동의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나도 어렸을 때도 내심 알았었지만 난 내 고집과 신념에 대해 누군가 한마디 하면 오히려 더 그 고집과 신념을 강하게 믿고 밀어나갔다. 어쩔 때는 사실 그게 똥고집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나의 이런 면 때문에 내 가족들이 나를 청개구리라고 별명을 지은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그 대화 이후에 그 손목시계만 매일 주구장창 (엄마 표현을 빌리자면) 계속 차고 지냈을까?


나는 그 손목시계를 S에게 선물 받고 적어도 4년에서 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찼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손목시계를 차고 저녁에 세수하기 전에 손목시계를 풀어놓고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이것 또한 과연 나의 쓸데없는 (다시 엄마 표현을 빌리자면) 똥고집이었을까? 지금 되돌아보니 이 손목시계 습관은 내가 나 스스로와 한 시간에 대한 엄숙한 약속이었다. 내가 생애 처음 받은 이 손목시계는 나에게 있어 단순히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로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시간만 알려면 그저 벽에 걸린 시계들을 확인하면 된다. 지금은 핸드폰을 확인하면 되는 듯이.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이 손목시계는 나에게 시간의 제한성을 매 순간 내가 보고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그런 물건이었다. 우리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하루에 주어지는 24시간을, 비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진 못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하기에, 그렇게 살면 금방 burn out 되어버릴 수 있다) 적어도 제한된 시간의 소중함을 되뇌고 또 되새기며 살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시간은 지나가는 것 흘러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사실 그 말은 맞다. 시간은 끊임없이 우리들 삶 속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갔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고 있고 또 앞으로도 흘러갈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부정하고 싶다고 해서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자연의 순리인 것이다. 만약 나중에 시공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해서 내가 처음 내 손목시계를 선물 받았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난 나 스스로에게 알려주고 싶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너는 네가 네 스스로 믿고 그것을 멈추지 않고 해 나간다면 적어도 훗날 너는 네 스스로에게는 떳떳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너의 그 작은 습관으로 단련된 네 의지와 신념은 그 누구도 쓰러트리지도, 너에게 앗아갈 수도 없는 너만의 힘이 된다는 것을. 마치 만화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너만의, 너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아이템을 얻는 것이라고.


그럼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좋아하는 내 손목시계를 차는 것을 그만둔 것일까? 어느 날 손목시계의 시간이 핸드폰의 시간보다 느려진 것을 발견했다. 계속해서 더 천천히 움직이는 시곗바늘들을 알면서도 나는 그 바늘들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그 손목시계를 차고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시곗바늘들이 완전히 멈추어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날 밤 나는 그 시계를 조용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손목에서 풀고는 어디선가 작은 상자를 하나 찾아와 그 상자 안에 그 손목시계를 잘 넣은 후 다시 한번 만져보았다. 여전히 손끝에 닿는 감촉이 처음 선물 받은 그 날처럼 금속 특유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이 먹먹해지면서 동시에 솜털처럼 가벼워짐을 느꼈다. 나는 그 손목시계가 든 상자를 조심스레 닫아 내 책상 서랍 안쪽에 넣으며 나만의 작별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슬픔만으로 가득 찬 작별인사가 아닌 슬픔과 고마움, 그동안 나를 잘 돌보아 주어서 참 고맙다, 또 끝까지 잘 버텨내어 주어서 대견하다, 등의 여러 가지 감정으로 충만한 그런 작별인사였다. 이 글을 쓰며 나는 나와 함께 참 많은 순간들과 시간들을 함께 해주었던 로즈골드 색의 금속 손목시계를 떠올리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그리고 따뜻해진다. 이 따뜻함을 소중히 여기며 나는 오늘도 내게 주어진 내 하루, 내 24시간, 내 1440분, 그리고 내 86,400초를 소중히 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이 서시에서 속삭이는 말처럼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내 삶의 많은 것들을 또 많은 사람들을 그저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


 추천곡: 영화 인셉션 중 Time by Hans Zi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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