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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은 Apr 01. 2021

우주 최강 1등보다 행복해지는 방법

중학교 1학년 때 성적표 이야기



중간고사가 끝이 나고 얼마 후 시험 성적이 나왔다. 성적표를 보니 내 성적은 지난번과 별반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어떤 과목들은 몇 점이 올라갔고 또 어떤 과목은 몇 점이 내려갔지만 내가 매번 받던 성적들이랑 비슷했다. 그러려니 하며 성적표의 마지막 부분을 보는데 반 석차에 1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지금껏 나는 한 번도 반에서 1등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설레고 신나는 마음으로 흥분하여 얼굴까지 달아올랐다. 심장 박동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누군가 나보다 먼저 이 사실을 알아버리진 않았을까 서둘러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다들 자신의 성적표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처음 있는 일이라 그랬던 건지 신났던 건지, 혹은 아무도 아직 모르는 일을 나만 혼자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제일 먼저 알아냈다는 사실이 기뻤던 건지, 나는  기분이 좋아진 채로 성적표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곤 누가 먼저 말하기 전엔 절대 아무한테도 먼저 말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나는 1등을 했다는 사실보다 친구들과 반 아이들을 놀라게 해 줄 생각에 더 신이나 괜히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혼자 들떠서 마치 로또에도 당첨된 일인 양 콧노래를 부르며 빨리 누군가 이번에 우리 반 1등이 누구인지 맞춰보길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딱히 누구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먼저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나는 잠자코 계속 침묵을 유지했다. ‘누군가는, 누군가는 알아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반 친구들과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서 점심을 먹고 학교 운동장 계단에 걸터앉았다. ‘이제 분명 누군가 얘기하겠지?’라고 생각하며 다시 기분 좋은 긴장감을 느꼈다. 그리고 예상대로 아이들 중 한 명이 성적 얘기를 꺼내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때마침 점심을 드시고 나오시던 담임선생님께서도 우리들을 발견하시곤 곧 우리 쪽으로 걸어오셔서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셨다.


우리들은 우리들과 말이 잘 통하는 젊고 센스 있는 담임선생님을 다들 좋아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선생님 앞에서 곧잘 우리들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나 또한 그런 선생님이 편고 좋아했다. 아이들은 성적표 이야기를 하며 어떤 이들은 하소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성적이 올랐다 좋아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한 명이 물었다.


“야 근데 우리 반 1등이 도대체 누구냐?”


누군가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나 다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때까지도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무개(내 이름)가 이번 우리 반 일등이야.”


순간 나를 둘러싼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드디어 나만 알고 있는 이 비밀이 공개되었다는 것이 왠지 흥분되어 심장박동이 다시 빨라졌다. 그리곤 내가 입을 열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다른 아이가 나에게 재빨리 물어보았다.


“근데 너, 전교에서는 몇 등 했어?”


순간 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모두의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들이 나를 향해 있는 것을 깨닫고 약간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나 19등 했는데?”


내가 대답하자 순간 어색한 침묵이 공기 중에 흘렀다. 난 왠지 모르게 민망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방금 나에게 질문을 한 그 아이가 다시 말했다.


“선생님~ 어떡해요. 우리 반 1등이 전교에서 19등이래요! 19등!”


그 당시 우리 학급은 12개였다. 그 아이의 말을 시작으로 옆에 있던 다른 아이들도 대놓고 자신들끼리 그 사실은 굉장히 충격이다, 또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은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라는 이야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내가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말은 선명히 귀에 들려왔다. 그때 선생님께서 흥분한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말씀하시기 시작하셨고 난 희망을 부여잡듯 속으로 간절히 생각했다.


‘그래, 그래도 담임선생님이시라면...’


이윽고 들려오는 선생님의 한마디.


그러니까, 우리 반 1등이 전교 19등이 뭐니?ㅎㅎㅎ좀 창피하긴 하다


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에 아이들도 선생님을 따라 웃었다. 그리곤 아이들 사이로 나를 쳐다보던 선생님의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의 웃는 얼굴들, 그리고 귓가에 계속해서 울리는 그 웃음소리.




그날 나는 내가 어떻게 학교에서 집에 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동안 마음이 많이 아프고 괴롭고 외로웠었다. 그렇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왠지 누구에게 말하면 그 순간 온 세상이 나를 향해 웃을 것만 같아 너무 두려웠다.


자꾸만 떠오르는 반 친구들과 담임선생님의 웃는 얼굴들과 그들의 웃음소리들. 잊으려고 노력하면서 하루하루 건조하고 무의미하게 살려고 했다. 기쁨도, 즐거움도, 슬픔도, 분노도 모두 온몸으로 거부하며 마치 감정이 없는 로봇 인양 내 할 일만 하면서 아침이 되면 학교에 가고 집에 돌아오면 자는 생활을 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기말고사가 찾아왔고 난 그저 내가 하던 그대로 시험을 보고 얼마 후 성적표를 받았다. 나는 받은 성적표를 아무렇게나 가방에 구겨 넣고 있는데 옆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너 이번에 반 1등 했다며?”


고개를 돌리자 반 아이들이 한 명의 아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 그 말을 했던 아이였다. 곧이어 다른 아이가 말했다.


“근데 너 전교 석차도 꽤 높다며? 대단하다!”


아이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 아이가 말했다.


 “드디어 내가 있을 자리에 왔군.”




이 일이 일어난 후 십몇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꽤 최근까지도 문득 이때 기억이 떠오면 온몸에 분노가 끓어 폭발한다. 그때는 속상해서 그저 속상한 마음이 너무 커서 아무 말도 못 하고 혼자 괴로워했던 사실이 제일 화가 난다. 그리고 내 아까운 시간들과 에너지를 이런 쓸데없는 것에 소모했다는 사실도 너무나 화가 난다. 할 수만 있다면 다 부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저 나의 이성을 완벽히 장악한 분노에 휩쓸려 그때 그 아이들과 담임선생님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하지만 몇 번을 그렇게 반복해도 내 마음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마다 내 마음은 반복적으로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지고 부서져서 끝내는 부스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머리로는 멈춰야 해야 하는 것을 알았지만 매번 그때 일이 떠오르면 어느새 그들을 저주하고 또 저주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분명 누군가를 이렇게 미워하고 저주하는 것도 너무 고통스러운데 왜 나는 멈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일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J와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들은 서로 안 좋은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게 되었다. 나도 용기를 내어 그때 내가 겪었던 성적표 이야기를 J에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J 또한 비슷한 일을 나와 비슷한 때에 겪은 것이 아닌가?

 

우리는 너무 놀라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에게만 일어났다고 믿고 살아왔던 그 안 좋았던 일이 내가 현재 같이 살고 있는 사람에게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게 일어났다는 사실이 충격인 동시 어떤 면에서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그 안 좋은 기억들 위로 덮어놓은 무거운 덮개를 싹 걷어버리고 그

 밑에 있던 우리들의 감겼던 눈을 뜨게 해 주는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서로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자신의 일에 대해 느꼈던 분노보다 더 크게 분노를 느끼며 핏대를 세우고 한바탕 욕을 실컷 해주었다. 그리곤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이야기했다.


그때 우리가 잘못한 것은 없다고.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고.


J와 대화해보니 그때 내가 겪은 일들에 대한 몇몇 사실들이 아주 명확해졌다.


1) 그 누구도 나에게 내 성적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내가 나 스스로의 능력치와 노력을 가늠하는 도구일 뿐이다.


 2) 내가 반 1등을 하던 반 꼴찌를 하던 전교 1등을 하던 전교 꼴등을 하던 그건 온전히 내 일이다. 누가 나에게 왈가왈부 참견할 일도 비난할 일도 축하할 일도 아니다. 어느 누구라도 심지어 선생님일지라도 나에게 올바른 조언이 아닌 이런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듯 말할 순 없다. 안타깝게도 그때의 나는 생각의 힘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애꿎은 스스로만 괴롭히며 또 두려워하며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덮개로 내 눈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당당히 눈을 부릅뜨고 세상에 소리칠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나를 포함한 이 세상 그 누군가 나에게 함부로 말하고 상처를 준다 해도 다시는 곧이곧대로 그 말을 믿지도 않을 것이고 또 상처 받지도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그때 그 운동장에 모여서 같이 이야기했던 반 친구들과 담임선생님을 향해서 목이 쉬어라 외친다.



“내가 반 1등 하는데 또 전교 19등 하는데 도움 준거나 있니? 나는 그냥 내 공부 내가 알아서 하고 있는데 왜 당신들이 내 석차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참견인데? 내 부모님도 내 성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데.


그리고 담임선생님, 선생님이란 분이 아무리 젊으시고 경이 많이 없으셔도 그렇지요. 선생님도 물론 사람이라 불완전하겠지만 그래도 어린 제자한테 당신까지 그렇게 말하면 씁니까? 당신의 그 한마디가, 그리고 그 한마디를 하며 웃던 당신의 그 얼굴이 평생 그 제자한테 상처가 될 것이라는 건 꿈에도 몰랐습니까? 설마 알고도 그러진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 제가 마음이 편할 것 같군요. 생각해보면 저는 그때 그 일 이후 공부라는 것에 한없이 허무함을 느꼈습니다.


단지 성적을 위한 공부. 성적표 한 장으로 판단되었던 나의 가치. 사회는 도대체 왜 1등을 강요하는 거죠? 1등이 되면 행복해지나요? 왜 빌어먹을 1등이 아니면 소용이 없나요? 가치가 없나요? 나는 분명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부했는데 단지 1등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들은 없던 것이 되나요? 아니, 없던 것만 못한 것이 되나요? 그리고 만약 내가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어느 정도 운도 좋아서 반에서 1등이 되었는데 왜 사회는 내가 전교에서 1등이 못되어서, 시에서 1등이 못되어서, 전국에서 1등이 못되어서, 세계에서 1등이 못되어서 나를 비판하나요?


도대체 그놈의 1등의 끝은 어딥니까? 아주 은하수에서 1등, 아니 우주에서 1등이 되라고 하시지 그러나요. 나에게 이렇게 1등이 되라고 1등만이 행복하다고 가치 있다고 말하는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길래 나에게 그렇게 강요하나요?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나요? 당신의 삶은 행복한가요? 아니면 우리들처럼 끝이 없는 이 1등만 찾고 1등만 인정해주는, 그래서 이를 악물고 어떻게 서라든지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이런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진 않은가요?


제발 당신이 눈을 뜨길 바랍니다. 인간은 1등이 된다고 결코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니까요. 진정 중요한 것은 내가 한 인간으로서 1) 도덕적 의무를 다하며 2) 내게 주어진 일들을 잘 해내고 3)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서 4) 사회적 약자들을 돕고 5) 불의를 참지 말고 용기를 내고 6)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지혜와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전 분명 우주 최강 1등이 전혀 부럽지 않은 저만의 행복한 삶을 살 것입니다.”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쓴 글입니다.
다소 감정이 지나쳐 보이는 부분들도 생생한 그 시절 제 중1의  감정 전달을 위해 용기 내서 포함했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성장이 많이 필요한 제 글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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