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선인장
1년 전 직장을 갑자기 그만두면서 내 인생에는 전에는 알지 못했던 시련이 찾아왔다. 모진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찾아온 그 시련은 쉼 없이 내 몸과 마음을 몰아붙였다. 그동안 내가 굳게 믿어왔던 신념과 믿음이 한순간에 부서져 가루가 되어버린 것 같아 허무하고 마음이 아팠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아주 작은 일에도 시도 때도 없이 감정이 끓어 넘치곤 했다. 미움으로 시작하여 괴로움으로, 두려움으로 시작하여 슬픔으로. 한바탕 감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꺼끌꺼끌한 모래알들만 잔뜩 남겨져있었다. 털어도 털어도 끊임없이 나오는 모래알들을 어찌할 줄 몰라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주리라 믿었다 미움도, 괴로움도, 두려움도, 슬픔도 모두 시간이 지나면 바람에 멀리 날아가버릴 것이라고. 하지만 내 간절한 바람과 달리 모래알들은 고집스러웠고 잊을만하면 하나 둘 튀어나왔다. 신발 속에 숨은 모래알들처럼. 그리곤 마치 자신들의 존재를 일깨워주려는 듯 내게 내 마음 안의 감정들을 바라보라고 소리치는 듯했다. 처음 나는 그 감정들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에 매번 외면하거나 덮어버렸다. 영혼이 서서히 메말라는 것도 모른 체.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은 신기하게도 결코 틀리지 않은 말이다. 불현듯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요동치는 밤이면 베란다에 나가 잠든 도시와 그 도시를 감싼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아주 멀리서 은은히 반짝이는 불빛들과 별빛들이 내 마음 깊은 곳을 쓰다듬어주는 듯했다. 무언가를 마주한다는 것은 실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왼쪽으로 또 오른쪽으로 살짝 피해도 안되었고 또 몰래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아도 안되었다. 나는 진정 나아지길 원했고 그러기 위해선 오로지 진실하게 임해야 했다. 잠든 도시와 그 위로 펼쳐진 거대한 밤하늘 앞에서 나는 매일 밤 조금씩 내 모래알들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껄끄럽게만 느껴졌던 모래알들이 조금은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지난 1년 동안 다양한 크기의 모래폭풍들이 나를 찾아왔었다. 많은 날들 나는 나 자신과 내가 만든 선택들을 의심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가 며칠 불타오르다가 꺼지고 또 타오르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무언가 변한 것 같았지만 막상 콕 집어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지 말할 수가 없었다. 답답함과 당혹스러움에 의기소침해있던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아빠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아빠는 지난 1년 동안의 내 모습을 지켜보시며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본인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주시곤 했다. 나는 머리로는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세상엔 완벽한 사람은 없다’라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가슴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힘들어서였을까? 혹 나는 잘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을까?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그런 내게 아빠의 “완벽하지 않은” 경험담들은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아빠는 말씀하셨다. “젊었을 때 하는 고생이 중요한 이유는 인생을 풍성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란다. 우리는 시련과 역경들을 통해 인내심을 기르고 마음을 수양할 수 있지. 그리고 마음을 계속 수양하면서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내 마음을 여는 방법을 배우게 된단다. 그래야만 내 마음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그릇을 넓히도록 노력해야 한단다.”
아빠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비록 지난 1년 동안 네가 이룬 것이 없다 느끼겠지만 네 마음은 전보다 훨씬 더 열렸단다. 다른 사람의 조언에 귀 기울이고 경청하는 것,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모두가 그 증거지.” 생각해보니 1년, 아니 6개월 전의 나는 분명 달랐다. 누군가 나를 위해 조심스레 건넨 조언에 기분이 상해 짜증을 내거나 지나치게 자기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지금까지 나는 스스로의 약한 부분을 인정하는 것이 낯설고 두려웠다. 누군가 진심으로 나를 위해 건넨 조언도 나의 부족한 부분을 들추어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래서 누군가의 조언에 지나치게 자기 방어적이 되었던 것이다. 나의 닫혀있던 마음 때문에 나도 상대방도 마음이 다쳤다. 또 새로운 일은 일 때문에 피곤하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했었다. 시도한다고 해도 내 삶이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계속 꿈을 꾸면서도 그 꿈을 이루려는 용기는 부족했다. 무엇보다 예전의 나는 내가 원할 때만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원하지 않을 때는 외면했다.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했고 나는 편한 것에 안주하는 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아빠와의 대화 후 산책을 나갔다. 날씨는 화창했고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걸으며 나는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지 눈으로 보았다. 모두 생긴 것은 다 달랐지만 화창한 날씨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작은 꽃가게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작은 선인장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미니 선인장들이 너무 귀여워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선인장들도 거리의 사람들 마냥 생긴 것이 제각각이었지만 하나하나 그 나름대로 예뻤다. 사랑스러웠다.
선인장들의 꽃말도 그 종류만큼 다양한데 그중 귀면각 선인장의 꽃말은 ‘인내’이다. 이 꽃말은 시련과 역경을 통해 인내심을 기를 수 있다는 아빠의 말씀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우리 인생에는 여러 시련과 역경이 찾아온다. 때론 아무런 이유 없이도 그냥 찾아온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를 믿는 것이다. 내가 이 시련과 역경을 이겨낼 것이라고, 내가 이 아픔과 두려움을 극복할 것이라고, 그리고 내가 지금보다 더 성장해서 큰 그릇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믿음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혹독한 사막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선인장의 인내를 본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인장들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때마침 올려다본 하늘에도 흰 구름이 두둥실 떠있었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내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모래알들을 모아 구름에 실어 멀리멀리 보내주었다.
“안녕. 잘 가!
너희도 고생 많았어.
이제 우리 모두 기쁘게 살자.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