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걷는다

자작시

by 이제은

전철에서 내려 계단을 걸어 올라오면

가장 먼저 거리의 공기가

구름사이로 하늘의 빛이

자동차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두발이 지상에 닿을 때의 안전한 느낌을

일분정도 느끼고 걸을 방향을 정한다

오늘은 어디로 걸을 것인가

나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을 갖는다


나는 걷기 시작한다

그러자 낯선 얼굴들과 그들의 표정들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스쳐 지나간다

나는 그들을 알지 못하고

그들도 나를 알지 못하기에

우리들의 표정엔 아무것도 없다

그 무표정들이 편안하게 느껴질 때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내가 아무도 아니라 느껴질 때

나는 설명할 수 없는 희한한 해방감에 휩싸인다

볼과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가는 차가운 바람처럼

몸도 영혼도 무한히 자유롭다

하늘을 나는 저 새들이 부럽지 않은 순간.


그 순간을 천천히 음미하며 걷고 또 걷는다

스쳐 지나가는 많은 것들이

그저 나를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둔다

딱딱하고 고집 센 내가 아닌

투명하고 형체가 없는 나를 통과해 지나가도록.

문득 나는 너를 떠올린다

왜 나는 유독 너에게만 바라는 것이 이토록 많을까?

분명 너는 나를 사랑하고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왜 자꾸만 사랑을 느끼기를 원할까.

무엇이 자꾸만 내 안을 불안하게 흔들어대고

모래가루처럼 흩어지고 또 흩어져

끝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게 만드는 것일까


그러나 시간이 다 된 모래시계를 다시 뒤집어

또다시 고운 모래와 함께 시간이 흐르듯

영원히 멈춰있을 것 같았던 너와 나의 시간이

내 안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다시 너의 말 한마디에 미소 짓고

너의 따뜻한 손길 한번에 설레어하며

네 생각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겠지

어제와 그저께처럼.


도시를 걸으며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은 단지 해방감과 자유만이 아니었다

너를 향한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이 큰 세상 속에서 놀랍도록 나와 닮은 너를

내 마음을 편히 쉬게 해주는 너를

내가 나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너를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한다며 아무 말 없이

다정한 눈길로 나를 어루만져주는 너를 느낀다


과연 앞으로 너와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이미 너를 만난 것 자체가 기적일 수도 있다

결코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는 기적.

지금 내게 찾아온 너를 마음껏 사랑하는 일은

너와 나의 각자 부족한 점들이 아닌

서운하거나 외로워했던 순간들이 아닌

괴로워하거나 슬퍼했던 순간들이 아닌

우리가 서로에게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이 있음에

잊고 있던, 혹은 알지 못했던 행복과 기쁨들에

당연히 여겼던 수많은 작은 것들에 대한 감사함에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하는 것.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 큰 도시 한가운데 서서

나는 내게 묻는다

나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아니, 어디로 향하고 싶은가

아니, 어떻게 네게 다가가고 싶은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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