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맥빌> 중에서
The world is no longer a romantic place.
Some of its people still are, however.
And therein lies the promise. Don’t let the world win, Ally Mcbeal.
- ‘Ally Mcbeal’ S1 E06 - The Promise
학창 시절부터 수많은 미드를 봤다. <그레이 아나토미>, <하우스>, <보스턴 리갈>, <로스트>, <위기의 주부들> 등. 하나도 빠짐없이 유명하고 훌륭한 작품이었지만, 그중 가장 감명 깊었던 작품을 꼽자면 단연 <앨리 맥빌>이다. 앞서 언급한 보스턴 리갈도 앨리 맥빌을 만든 데이비드 E. 켈리의 후속작이라서 보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내게 앨리는 좀 특별했다. 앨리는 명문대 출신의 변호사지만, 현실 감각은 일반인보다 현저히 떨어지고 자신만의 환상 속에 살며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는 감정적인 캐릭터다(미드 속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감정적이지만, 유독 더). 드라마는 이런 앨리를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디즈니 플러스 덕분에 10여 년 만에 <앨리 맥빌>을 다시 보기 시작했는데, 지금 와서 새삼 느껴지는 건, 이 드라마는 법리에는 관심이 없다는 거다. 90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제공하고 질문을 던질 뿐이다. 로맨틱한 사랑은 환상 속 유니콘이 되어 버리고, 피상적인 관계가 만연해 있는 풍조 속에서 영원한 사랑을 찾는 앨리는 철딱서니 없는 여자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앨리의 일희일비에 동조하며 앨리를 응원하게 된다. 나도 사랑스러운 앨리처럼 멋진 사랑을 꿈꾸면서.
한창 <앨리 맥빌>에 빠져있던 시기에 개설한 내 오래된 네이버 블로그에는 개설 당시부터 쭉 쓰여있는 문구 하나가 있다. ‘Don’t let the world beat you’. 내가 왜 win을 beat으로 바꾸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의 심정을 좀 더 정확히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쨌든 한창 꿈과 의욕이 넘치고 낭만을 꿈꾸던 20대의 나에게 앨리를 응원하는 존 케이지의 저 대사는 마치 나에게 하는 대사 같았다. 세상살이가 팍팍하고 고되도, 설령 이 세상에 낭만이란 존재하지 않더라도, 절대 세상에 지지 말고 나의 꿈과 낭만을 지키라는.
그 후로 어느새 10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저 대사는 아직도 내 블로그 대문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지만, 솔직히 저 대사를 계속해서 인지하고 살아오진 않았다. 나는 과연 저 대사처럼 인생을 살아왔을까? 아직까진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얼마 전, 이런저런 이유와 사정으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만나지 못 했던 대학교 후배들을 만났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하나도 안 변했다. 똑같아.’
우리 모두 그 오랜 시간 동안 꽃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팍팍한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크고 작은 우울과 고난을 겪었다. 그럼에도 다시 만난 우리는 학창 시절 순수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경계심 없는 해맑은 웃음, 계산 없이 털어놓는 속마음. 우리는 만나는 내내 대화 중간중간 감탄처럼 털어놓았다.
‘근데 옛날이랑 진짜 똑같다.’
나도 내가 느낀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우리가 10년 동안 세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잘 지켜 왔나 보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 사회생활 경험을 쌓으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소위 꼰대가 되거나 혹은 일상적으로 남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사실 이런 모습은 너무나도 흔하다. 그렇기에 오랜만에 만난 후배들이 여전히 반짝거리는 20대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걸 보니 감개무량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모습이 될지는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계산속 없고, 남을 함부로 대하는 게 여전히 어렵고, 남의 감정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을 지켜왔다는 게 기특했다.
지금 <앨리 맥빌>을 다시 봐도, 이 대사에 깊이 공감하는 걸 보면, 난 아직도 이 대사처럼 살고 싶은 모양이다. 그리고 또다시 10년 후에도 어김없이 말하고 싶다. 예전과 똑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