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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성일 Jan 25. 2022

008. 니카라과 유학생활: 쫓겨난 과학선생님

#아동성애자? #무고한희생양? #아직도알수없네


니카라과에서 7학년부터 12학년까지 외국인 학교를 다니며 한국에서는 생각도 못할 일들을 많이 겪었다.

한국이 더 좋다, 니카라과가 더 좋다,라고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외국에서 공부하다 보니 이런 일도 있네요~'라고 할만한 내가 겪은 이야기들이 있다. 문화적인 차이, 관습적인 차이, 교육시스템 자체의 차이에서 파생된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한국에서는 선생님을 제2의 부모라고도 이야기하고, 스승의 그림자도 함부로 밟지 말라고 하지만 니카라과에서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선생님은 학생에게 교육자 이자 지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이지 그 이상의 우대는 없다. 오히려 선생님과 학생이 상급자/하급자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관계로 여겨지며, 역할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이시니까,라고 그 사람의 허물을 가려주지 않고, 설마 선생님이 그러시겠어, 라는 수동적인 태도도 없다. 선생님께 조금의 잘못이라도 있다면 그에 대한 가차 없는 처분이 이루어진다. 뭐 외국인 사립학교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겠지만. 


오늘 이야기는 과학을 가르치시던 우리 학교 과학선생님이 학생들의 증언으로 아동성애자로 몰려 학교에서 잘린 이야기. 정말 아동성애자였는지, 무고한 희생자였는지 아직도 나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하고 구체적인 증언이 아닌 한 그룹의 학생들이 주도한 단체적이고 모호한 증언으로 단시간 내에 이루어진 일이었음은 확실하다. 10여 년을 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사건이 시작된 후 10일도 안되어 해고당한 과학선생님. 그는 과연 정말 아동성애자였을까, 아니면 무고한 희생양이었을까?






내가 12학년이었을 때의 일이다. 


외국인 사립학교에서 졸업학년인 12학년이 된다는 것은 더 적은 제약과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고3으로서 1년이 제일 힘든 시기지만, 니카라과에서 12학년은 1학기만 끝나면 대부분 대학입시가 끝나는 만큼, 12학년은 학교의 한량들이다. 각 과목의 선생님들도 어차피 진도도 끝났고 더 가르칠 내용도 없으니 12학년 이벤트들 기획하라며 수업시간도 자유시간으로 내준다. 12학년 2학기에는 작별 파티, 시니어 파티, 페어, 프랭크 이벤트, 졸업파티 등 12학년 주도로 이루어지는 전교 축제가 많았다. 우리는 그런 자유시간들을 통해 축제를 기획하고, 예산을 나누고, 역할을 분배하곤 했다.


한 무리에는 꼭 말 많은 사람, 소문 옮기는 사람이 하나씩 있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스페인어 선생님은 참 말이 많으신 분이었는데, 굳이 학생들이 몰라도 될 사실까지도 이야기해주고는 했다. '아 나는 잘 모르는데~나도 들은 건데~' 말해줄 듯, 안 말해줄 듯하다가도 학생들이 집요하게 물어보면 못 이기는 척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놓는 식으로.


그 선생님의 수업시간이었다. 아니, 자유시간이었다. 원래는 졸업파티에 쓸 장식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었는데 잘 흘러가다가 이야기가 샜다. '아 혹시 그 이야기 아나? 아 모르면 말고, 너네는 몰라도 돼. 아이 진짜 비밀이야, 과학선생님 있지...' 이야기하는 것만 듣고 에휴, 저 선생님 또 시작이네 싶어 뒷문으로 살짝 나가 화장실에 다녀왔다. 흔한 뒷담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이야기는 내가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굉장히 진전되어 있었다.


아니 선생님이 아동성애자라고?


어디서나 그렇듯 서두를 꺼낸 사람은 일의 스케일이 커진다 싶으면 뒤로 조용히 빠져있는다. 뼈대에 살을 붙이고 모양을 만드는 것은 나머지 사람들의 일이다. 사실 나도 그런 일 있었어, 지난번에 심화학습할 때 있잖아, 이상하게 가까이 와서 도와주시더라고. 아 사실 나도 시험 과락했을 때 보충 수업할 때 딱 붙어서 알려주시는데 좀 이상했어. 여기에서 끝날 줄 알았던 이 이야기는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12학년의 몇몇 목소리 큰 학생들이 학교에 과학선생님의 해고를 요구하겠다며, 12학년 전체 이름으로 서류를 작성해 모두 서명하자고 나선 것이다. 서명한 서류를 학교에 제출하면 과학선생님 해임에 정당한 사유가 될 것이라고. 


다수가 주장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신빙성이 있는 증거가 되나? 구체적인 증언이나 증거가 있어야 되지 않나?라는 내 말은 다수에 묻혔다. 그래 너네 맘대로 해, 근데 나는 본 것도 겪은 것도 없으니 너네가 서명할 서류에 내 이름은 빼줘. 내 말에 동의한 단 한 남학생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다. 자세한 내용들을 모아서 워드로 서류를 작성하고, 프린트하고, 이름을 쓰고, 서명을 했다. 학교 교장에게 서류를 제출하기 직전, 대장격인 학생이 내게 와서 말했다


"소성일, 이왕이면 12학년 전체의 뜻이라고 전달하고 싶어. 네 이름도 쓰고 서명해줘. 다 진짜 있었던 일이야"

"나는 이 일에서 빼줘, 나는 모르는 일이야"

"너랑 제일 친한 친구 ㅇㅇㅇ도 사인했어"

"걔는 걔고 나는 나지. 그렇다고 내가 너네의 반대편에 서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잘 생각해봐, 우리는 곧 졸업하고 떠나지만 우리보다 어린 학생들이 있어. 아동성애자 손에 그 어린애들을 맡긴다는 게 말이 돼?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어!"


실랑이 아닌 실랑이 후, 결국 서류는 '소성일과 ㅇㅇㅇ를 제외한 나머지 12학년' 일동이라는 우스운 문장을 마지막으로 나와 다른 남학생 둘을 제외한 나머지 12학년의 서명과 함께 교장에게 직접 전달되었다. 


며칠 후 과학시간이었다. 과학선생님은 키와 덩치가 큰 50대 중후 반대 니카라과 사람으로, 의사 자격증이 있지만 선생님으로서 가르치는 것을 더 좋아한다며 청진기 대신 교단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나는 과학선생님을 좋아했다. 머리 좋은 사람이 아니라 노력하고 성실한 사람이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수업을 하셨거든. 시험 전에는 항상 예상문제지를 나누어주셨는데, 예상문제지를 끝까지 다 풀어보고, 어려운 문제는 직접 와서 물어보고 해설을 들어야만 풀 수 있는 문제들을 시험에 내셨다. 교과서만 훑어본다고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 시험이 아니었다. 끝까지 매달리고, 집요하게 연습해야만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시험과 과제들이 많았다. 내 노력이 결과로 보상받는 그 수업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수업을 하는 과학 선생님을 좋아했다.


하필 과학 시간에 교장실 비서가 교실로 와 몇몇 학생들을 데려가도 되겠냐고 호출했다. 과학선생님은 흔쾌히 그러라며 장난식으로 우리에게 물었다


"아이고 이런 장난꾸러기들,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글쎄요 선생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선생님도 관련되어 있는 사고인 것 같아요...


무슨 일이길래 교장실에서 부르냐며 도와줄 수 있는 일이면 언제든 말하라는 과학선생님께 다들 어색하게 웃었다. 몇 명이 교장실에서 돌아오고, 다시 다른 몇 명이 불려 갔다. 서명하지 않은 우리 두 사람도 맨 마지막에 불려 갔다. 교장실에는 각각 들어갔는데, 그 안에는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 그리고 코디네이터 선생님도 계셨다.


"이번에 12학년에서 제출한 서류 말이야..."

"저는 그거 사인 안 했는데요"

"알아 그래서 불렀어. 넌 왜 사인 안 했니? 혹시 구체적인 이유가 있니?"

"뭐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정말 몰라요. 저는 제 스스로가 이 일에 연루되지 않았으면 해요"


할 이야기가 있다면 해달라는 교장선생님의 끈질긴 설득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떠한 형태로든 이 일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과학선생님이 옳지 않은 일을 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뭔가 아는 척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렇다 저렇다 할 말도 없었다. 나는 정말 아는 것이 없었다.




일이 있은지 대략 1주일 후, 과학선생님이 바뀌었다.


12학년들은 그게 자신들의 승리인 마냥 저들끼리 자축했다. 입맛이 썼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학교에서도 이전에 과학선생님이 문제 될 만한 비슷한 행동을 한 전력이 있어 빠른 처분이 내려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전에도 선생님이 학생에게 부적절한 접촉이 있었다는 것일까? 아니 이 소문 자체는 진짜일까? 과학선생님은 아동성애자일까? 아니면 마녀사냥의 희생자일까?


오스카 와일드가 이런 말을 했다

"The truth is rarely pure and never simple."

"진실은 순수하기 힘들고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 일의 진실도 아마 그런 맥락일 것이다. 선생님이 그런 부적절한 행동을 했을 수도,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학교에서 선생님을 해고했을 수도, 아니면 모든 것을 알게 된 선생님이 자진해서 사표를 냈을 수도 있다. 나는 오늘까지도 아마 순수하지 않고 복잡할 진실을 모른다. 다만 그 이후의 일들은 알고 있다. 교원가족 학비 무료 혜택으로 우리 학교에 다녔던 손녀딸은 결국 학교를 옮겼다. 우리 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수학&과학 과외를 하던 선생님의 딸도 과외가 끊겼다. 선생님은 한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리고 몇 달 후, 페이스북으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집 근처에 본인의 이름으로 작은 병원을 열었다. 

당뇨, 고혈압을 전문으로 보는 병원을 열어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지금도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가끔 선생님의 소식과 사진들이 올라온다

딸과 찍은 사진, 손녀딸과 보낸 연말 등...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생님 페이스북의 커버 페이지는 마지막으로 당신이 담임을 맡았던 학생들과 같이 찍은 사진이다. 


진실은 무엇일까?






008. 니카라과 유학생활: 쫓겨난 과학선생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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