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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성일 Jan 31. 2022

009. 쿠바에서 생긴 일

#모든여행자에게는 #잊지못하는 #여행지가있지요


모든 여행자들에게는 잊지 못하는 여행지가 있다


중남미 여러 나라를 거쳐 14년을 살며, 중간중간 근처 여러 나라로 여행을 다녀온 나도 그렇다.

마치 어제처럼 느껴지는 그 여행은, 아직도 눈을 감으면 올드카의 화려한 색들과, 바닷바람 짠 냄새와,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을 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르게 한다. 내가 잊지 못하는 이 여행지는 쿠바다.




당시 나는 코스타리카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짧은 방학을 맞아 가족들과 쿠바에서 만나 여행하기로 했다. 쿠바로 취항하는 항공사는 당시 단 두 군데였는데, 그마저도 비행 일정이 많지 않았다. 가족들과 같은 날에 쿠바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내가 먼저 가있으면 3일 정도 후에 가족들이 니카라과에서 오기로 했다. 그렇게 3일 정도 혼자서 여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쿠바는 첫출발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아침 11시 30분에 출발해 오후 3시 도착 예정이었던 비행기가 3시간 연착되었다. 그리고 세 시간 후, 다시 세 시간이 연착되었다. 첫 연착 때는 그래도 사람들이 여행의 기쁨에 들떠 그러려니 했지만 두 번째 연착 소식에는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았다. 대체 연착의 이유가 뭐냐는 말에 지상직 항공사 직원은 비행기 고장 때문에 수리에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 


사람들은 아니 그럼 우리는 고장 나서 수리한 지 얼마 안 된 비행기에 타야하는거냐며 술렁였다. 

나는 고장이고 자시고 상관없으니 빨리 비행기가 와서 출발이나 했으면 했다.


6시간이나 공항에 있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세 번째 연착 소식에 내 옆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도저히 이건 아니라며 고개를 젓더니 자기가 한마디 해야겠다며 비장하게 일어났다. 나는 피곤함에 지쳐 풀린 눈으로 아저씨를 올려다보며 응원을 보냈다


"내가 이번에는 정말 한소리 단단히 해야겠어! 9시간씩 연착하면서 아무런 조치가 없다는 게 말이 되냐고!"


씩씩 거리며 일어난 아저씨가 항공사 카운터에 가까워질수록 그 기백이 사그라들더니, 마침내 카운터 앞에 서자 지상직 직원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 저... 아가씨 혹시 화장실은 어디 있죠?"


화장실은 저 쪽에 있다고 손짓하며 가리키자 그 때야 황급히 물었다


"실례지만 비행기는 언제쯤 출발하나요?"


아직 쿠바 측에서 연락받은 내용이 없다고 대답하자 멋쩍게 웃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코스타리카 사람이 화를 낸다니, 내가 뭘 기대한 걸까.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정말 화를 내지 않는다. 

화를 낼 줄 모른다. 이 순진한 사람들




세 번째 연착 소식 후 얼마나 지났을까 지상직 직원들도 항의에 지치고 승객들도 기다림에 지쳐갈 때였다. 나와서 미안하다 비행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최대한 빨리 수리 중이다 라며 웃으며 양해를 구하던 사무장쯤 돼 보이던 나이 지긋한 남자 직원이 있었다. 항의가 심해지자 말단 직원들만 카운터에 세워놓고 본인만 쏙 사라졌다가 항의가 거세지자 다시 나타났다. 음... 취한 채로.


"야아이이쒸이이이 가자고도 어? 비행기 오면 가면 될 거아니야아아아"


지상직 직원이겠지? 설마 객실 승무원은 아니겠지?

아 설마 기장은 아니겠지? 아이 진짜 설마 아니지?


"뭐 고장 좀 날 수 있는 거 아니야아아 야이쒸 XX 가자고 가! 비행기 곧 있음 온다고오오"


왜 자꾸 가자고 "VAMOS" (우리-의 인칭대명사 IR '가다'의 동사변화)라고 하는 거야, 본인도 같이 가는 거야? 술 취한 채로? 비행기는 여유분이 없어 고장 난 것 억지로 수리해와서 타고, 승무원은 취해있고. 이번 여행 괜찮은 걸까 라는 의구심이 들 때쯤 드디어 보딩이 시작됐다. 연착된 지 12시간 만의 탑승이었다.




쿠바의 첫인상은, 아, 후끈하다! 였다.

내리자마자 뜨거운 공기가 한 번에 밀려왔다. 

캐리어를 찾으러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섰다. 컨베이어 벨트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 옆에서 소리쳤다


"전기가 나가서 다들 좀 기다리셔야 합니다!"


중남미 나라들이 전기 사정이 안정적이지 않은 것은 알고 있지만 공항에서 마저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줄은 몰랐다. 대부분의 공공건물은 자가발전기를 따로 갖고 있을 텐데 무슨 일인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눈으로는 앉아있을 만한 곳을 훑었다. 전기가 나갔으면 금방 돌아오진 않을 테다. 알고 보니 당시 미국의 쿠바 제재로 베네수엘라에서 석유를 들여오던 길목이 끊어져 전기 상태가 불안정한 때였다. 


배가 고팠다. 비행기 안에서 나눠준 빵과 플라스틱으로 소포장된 하얀색 물을 꺼냈다. 우유겠거니 하고 알루미늄 뚜껑을 벗겨 빵에 적셔먹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프림이었다. 나는 원래 커피를 안 마셔서 그게 프림인지 몰랐지 뭐.


하여튼 미국의 대쿠바 제재는 작은 동양인을 쿠바 공항 구석에 쪼그려 앉아, 퍽퍽한 빵을 프림에 적셔먹게 했다. 분하다.




쿠바는 다른 중남미 나라와는 달리 치안에 있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사회주의 국가로서 강력한 공권력을 가진 쿠바에서는 혼자 여행하는 것도, 밤에 돌아다니는 것도,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위험하지 않다. 중남미에 살면서 항상 경계하고 긴장하며 여행하다가, 이렇게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긴장을 풀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


광장에서 광장을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오감의 이야기가 있음을 알게 된다.


거리에서 기타를 치며 앞에 지나가는 노란 원피스의 짧은 머리 아주머니에게 노래를 부르자고 소리치는 흑인 아저씨. 그리고 수줍게 웃으며 손사래 치다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려놓고 눈을 감고 노래 부르는 아주머니의 아름다운 음색. 내리쬐는 햇볕 아래 강렬한 색들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냄새. 그 모든 장면들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넉넉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면서도 노래 부르고 싶을 때 노래 부르는 사람들, 춤추고 싶을 때 춤추는 사람들, 이상하리만큼 여유로운 그곳이 황홀했다. 물질주의적 사회에서 온 이방인은 달떴다.




달뜬 이방인은 혼자 여기저기 부지런히 도 돌아다녔다. 

다들 작은 눈의 동양인이 스페인어로 이것저것 묻는 것에 놀라워하면서도 친절히 도와주었다. 

길을 가르쳐 준 레게머리의 쿠바 남자가 말했다


"너 스페인어 정말 잘한다! me caes bien (너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데) tengo una fiesta en mi casa hoy en la noche. estas invitada (오늘 우리 집에 파티 있는데 너 초대할게)"


이방인을 이방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반가웠다. 경계의 벽이 낮은 사람들은 처음 만난 나를 자기 집에 초대했다. 웃으며 내가 위험한 사람이면 어떡하려고?라고 묻는 내게 아냐! 너는 좋은 사람이야!라는 대답이 정겨웠다. 꼭 갈게!라고 말하고 헤어졌다.


나는 결국 이 파티에 가지 않았고, 5일 후 가족들과 함께 아바나 거리를 걷다가 거짓말처럼 이 사람을 다시 만났다.

너 왜 파티 안 왔어! 라며 반갑게 웃으며 뛰어오는 사람을 보며 내 동생이 물었다


"뭐야, 길 물어봤다가 파티 초대받았다는 거 허풍이 아니라 진짜였어?"





아바나는 아름다운 도시다. 아바나의 구시가지는 꼭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다.

어딜 가든 음악이 있고, 어디든 춤이 있다. 어딜 보든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있고, 어디로 향하든 유쾌함이 있다. 구시가지를 걷다가 현지 흑인 청년들을 만났다


"니하오!"

"no soy de china (나 중국 사람 아닌데)"

"곰방와!"

"no soy de japon tampoco (나 일본 사람도 아닌데)"

"de donde eres entonces (너 그럼 어디 사람인데?)"

"soy de corea (나 한국 사람)"

"como se dice hola en coreano? (한국어로 안녕은 뭔데?)"

"Si tu aprendiste decir hola en chino y japoneses en tu propia cuenta, por que yo te tengo que enseñar como decir hola? buscarlo tu, y tu aprendes como tu ha aprendido como decir hola en chino y japoneses (중국어나 일본어로 인사하는 법은 알아서 배웠으면서, 한국어로 인사하는 법은 몰라서 가르쳐달라니. 중국어나 일본어로 인사하는 법 찾아보고 배웠듯이 한국어로도 네가 배워와!)


처음부터 어디 나라 사람이냐고 묻지 않고 중국사람으로, 일본 사람으로 생각하고 말을 건 그 청년들이 밉살스러워 보여 새침하게 대답했다. 중국어나 일본어로 인사할 줄은 알면서 한국어로는 몰라? 흥


웃으며 아 가르쳐줘~라고 매달리는 그 양반들을 뒤로하고 바삐 걸으며 말했다. 

"다음에 나 만나면 그땐 꼭 한국어로 인사해줘!"


그때 누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헉 그 청년들이 뒤따라왔나 싶어 휙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쿠바 흑인 남자가 서있었다.


"no se preocupe, no soy alguien raro (놀라지 마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누가 봐도 이상한 사람인데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니요, 누구신데요?


"yo estaba viendo tu hablando con ellos. Me encanto como tu respondieste. Solo te queria decir que te admiro. Eres mas como una latina que asiatica! buen viaje (아까 네가 그 애들이랑 말하는 거 봤어. 너의 대답이 정말 멋졌어! 너에게 감탄했어. 동양인보다는 라틴사람 같았어. 좋은 여행 되길)"


그러더니 인사하고 사람들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총 맞는 줄 알았는데, 내 대답이 멋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반갑고도 낯설었다.

내가 직설적으로 말할 때마다 못됐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이 만나봤지만, 감탄스러워!라고 말하는 사람은 나도 처음이라. 




내가 쿠바를 사랑하는 이유는 많다.


처음 보자마자 너무 아름다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3분간 그저 바라보기만 한 바다. 


누군가 거대한 프로젝터 창을 펼쳐놓고,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상으로 만들어내서 프로젝터로 비춘 것 같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바다도 있고, 


여행하며 들렀던 아기자기한 수공예를 파는 곳들도 있고, 활기를 잃지 않는 거리의 사람들도 있고, 어딜 가서 뭘먹든 너무 맛있었던 쿠바의 음식들도 있고, 아직도 도로를 달리는 형형색색의 올드카들도 있다.


하지만 내가 쿠바를 정말 사랑하는 이유는, 그곳이 내가 나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낯선 사람도 경계하지 않는 사람들, 내가 노래 부르고 싶을 때 노래 부르고, 춤추고 싶을 때 춤춰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 곳. 내가 괜히 내 생각 그대로 직설적으로 말했다가 총 맞는 거 아냐? 칼 맞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쿠바라서, 나는 쿠바를 사랑한다.


나는 내가 아닌 것을 가장해서 사랑받는 것보다, 내가 나인채로 미움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쿠바를 사랑한다

쿠바는 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주고, 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줬거든


오늘도 나는 쿠바를 그리워한다.



009. 쿠바에서 생긴 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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