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몰랐다.
1.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막내고모, 그리고 동생들.
오래된 감나무가 마당 한가운데 터줏대감처럼 박혀있고 앵두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등
열매가 매달리는 나무만 있는 2층 집.
태어나서부터 20년 동안 나의 물리적 생활환경의 설정값이다.
늘 가족들이 많았고, 늘 무엇인가 사건들이 많았다.
가족이 많으면 예상치 못한 일들도 많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냥 막연히 우리 집은 늘 일이 많고
이 시끌벅적한 곳을 떠나고만 싶었다.
활동적인 동생들과 달리 나는 집 밖을 나가지 않았고 그때부터 소소히 책과 음악에 빠져 늘 다른 세상을
동경하며 살았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국과 밥이 있는 아침상 말고, 할아버지부터 드셔야 하는 그 딱딱한 기다림 말고
커피와 빵이 있는 아침을 동경했다.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잘 구워진 토스트에 딸기잼을 바르고
커피믹스를 타서 그렇게 아침을 먹고 싶었다. 늘 조용하고 착한 딸인 나에게 엄마는 관대하셨다.
커피믹스를 부탁드리니 무슨 학생이 커피를 마시나며 핀잔을 주시더니 이내 다음 달 아빠의 월급일이 지나고
테이스터스 초이스라 쓰여있는 유리병 커피와 프림, 그리고 설탕을 사서 부엌 한편에 두었다.
밤마다 달큼하게 커피를 타고 라디오를 들으며 공부를 한다는 명목으로 늘 다른 세계에 빠져있는 공상을 했다.
엄마는 시부모님과 철딱성이 막내 시누이 그리고 넷이나 되는 자식을 키우면서 늘 씩씩하고 긍정적이셨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 아니 마법사였다.
항상 끼니마다 그 많은 가족들의 음식을 준비하고 시부모님께 순종했으며 아빠한테는 더욱 잘하셨다.
그리고 나, 큰 딸, 어쩌면 엄마를 잡아두었던 올가미에 대한 사랑은 말하지 않아도 들통이 나는 특별함 이상이었다. 특별히 나에게 혜택을 준 것은 아니지만 나는 엄마의 사랑을 아니 엄마의 눈빛 안에 그녀의 삶의 이유로 존재했다. 그래서인지 엄마말을 거역하지 않았다. 반항을 하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조용히 그렇게 늘 다른 세상을 이 집에서의 탈출을 상상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결혼사진에는 내가 서 있다.
공무원집안의 잘 나가던 큰아들이 장교생활을 하던 그때 옥천 깡시골의 호수같이 크고 깊은 눈을 가진 여인에게 인생을 걸었다. 아들의 부모님은 다른 사람과 혼인을 준비하고 있었고 착한 아들은 생전 처음 부모님께 반기를 들었다. 그렇게 사랑의 야반도주는 시작되었고 나는 그 둘의 불안정안 사랑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내가 다섯 살쯤이었을까? 아침부터 결혼 잔치 음식을 다 준비한 신부는 부랴부랴 식장을 향해 달려가 무사히 꿈에 그리던 결혼식을 했다. 예물 반지 하나 못 받은 결혼식. 떡하니 다섯 살짜리 딸아이가 함께 서있는 결혼식. 엄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죽어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인이었고 본인이 곧 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귀하게 그만큼 무덤덤하게 키우셨나 보다. 우리는 서로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엄마 없는 처녀가 귀한 아들 꼬셔 도망가 딸아이 낳고 그 딸아이는 다행히 시부모님과 합이 들었는지, 아빠를 닮았는지 아빠의 부모님에게 사랑을 받으며 컸다. 다만 그 딸아이는 이 답답한 세계에서 두 세계를 늘 꿈꾸며 살았다. 빵과 커피와 음악이 있는 단출한 4인 가족 그렇게 늘 현대적인 소가족을 꿈꾸었다.
2.
그렇게 세련된 형태는 아니었지만 엄마는 늘 나를 채워 주셨다. 딸기철이 되면 막바지에 싼 딸기들을
왕창 사다가 하얀 설탕을 넣고 6개월치 먹을 양의 딸기잼을 끓였다. 저 멀리 골목밖에서도 우리 집 딸기잼 끓이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모아둔 꿀단지 병을 잘 씻어 햇빛에 바싹 말려 딸기잼을 담아놓았다. 내가 상상하는 그런 고급스러운 모양새는 아니지만 그 딸기잼 맛은 잊을 수가 없다. 20살이 넘은 뒤로는 그 맛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딸기잼이 준비되면 우유식빵 한 줄, 옥수수 식빵 한 줄을 동네 제과점에서 사 온다. 식빵은 일주일에 한 줄만 사주셨는데 딸기잼을 끓이는 날은 두줄이다. 갓 끓인 딸기잼을 식빵 반쪽에 가득 발라 반으로 접는다. 접시는 생각도 못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몫만 가져다 드리고 동생과 나는 잼 끓이던 솥 주변에 둘러앉아 전쟁을 한 판 벌인다. 막냇동생은 남자라 늘 특혜를 받는다. 나는 첫째라 늘 먼저다. 가운데 끼인 동생 둘은 그냥 사투다.
그렇게 우아한 딸기잼과 커피믹스는 아니지만 일주일의 호사는 단 하루에 끝이 난다. 어떻게 식빵 두 줄이 한 자리에서 없어졌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지금은 식빵을 한 줄 사면 먹다가 결국은 냉동실행이다.
늘 시끌벅적, 고민하는 부모님들, 무서운 할아버지 그리고 철없는 막내고모 그리고 저런 남자는 피해야지 했던 우유부단한 아빠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은 뒤돌아보아야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순하게 자란 탓인지 대학에 입학한 그 해부터 많은 선자리가 들어왔다. 엄마는 너무 어리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나에 대한 자부심이 나쁘지 않았나 보다. 이쁘고 착한 내 첫째 딸이자 나의 분신. 나는 끝까지 엄마와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엄마의 뜻에 따라 서너 차례 선을 봤다. 그리고 마침내 할머니까지도 흡족해하는 남자를 만나게 됐다. 친구들에겐 창피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의 친구들은 미팅 소개팅 헌팅 등 자유로운 연애관에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 집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나는 혼자가 편했다. 그렇다고 외톨이는 아니었다. 인기는 있는 편이었다. 또래 아이들과는 다른 큰 키에 하얀 깨끗한 피부가 나의 매력이었다. 나는 조용히 엄마와 할머니가 선택한 그 남자와 약혼을 하고 유학을 준비했다.
항상 계획에는 차질이 있는 법이다. 유학은 언어연수로 대체되었고 언어연수 후 결혼을 하고 하던 공부를 마치고 유학을 가라는 것이다. 나쁘지 않은 제의였다. 어쨌든 상관없다. 나는 탈출이 목표다. 그 후의 일은 그 후에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할머니가 더욱 좋아했던 그 남자는 집이 부자라고 했다. 그 당시 나의 전부였던 헤르만헤세, 윤동주, 그리고 음악들에 대해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안전한 만남 그리고 안정된 만남 그 안에서 그 남자는 나한테 매달리게 되었다.
나는 아주 못된 여자였다. 한겨울 눈보라를 품은 바람보다 더 차웠을 것이다. 그냥 그 남자를 나를 탈출시켜줄 열쇠로만 대했는데 그 남자는 우리 할아버지보다 더 무서웠던 부모님의 뜻에 순종을 하느라 내 차가운 행동을 견뎌냈다. 우리 할머니는 왜 이 남자가 그렇게 좋았을까? 어떤 모습을 보고 이 남자랑 결혼 안 하면 죽어서도 따라다닌다는 악담을 하셨던 것일까?
3.
23살, 27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둘이 결혼을 한다. 여자는 창피해 친구들도 안 불렀다. 결혼사진이 남자의 친구들로 가득하다. 여자의 동생은 결혼 전날 하얀 봉투를 내밀며 도망가라고 한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비행기 값을 모았다고 했다. 여자의 바로 아래 동생은 언니가 계속 공부하며 커피랑 빵을 먹으며 조용하게 언니답게 살기를 원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언니는 그렇게라도 엄마가 원하는 대로 탈출해야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축복은 시작되었다.
만만치 않은 생활이었다. 엄마의 최애였던 나는 항상 집안일에서 예외였다.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되는 살림이었다. 3대가 함께 사는 집안에서 노동력이란 정말 큰 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책 읽는 내가 좋아서 음악 듣는 내가 예뻐서 늘 둘째 셋째 동생들이 그 일들을 대신했다.
하지만, 시댁이라는 곳은 달랐다. 철저한 새마을 정신 새벽부터 모두가 일어나 밥을 먹고 모두 각자의 일을 하고 각자의 일을 알약서 했다. 아무것도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새벽밥을 짓는 시어머니 옆에서 졸기가 일 쑤였다. 커피와 빵? 구경도 못한다. 아침부터 고기를 굽는 이 집안의 음식문화는 친정보다 더 지독했다.
시댁은 집 짓는 일을 했다. 어머니가 재무, 인력 관리 아버지가 현장관리 그렇게 때문에 그들에겐 아침식사가 너무 중요한 일이었다. 늘 아침잠에 쫓기고 아침식사를 못 먹는 나는 6개월 만에 그 집에서 도망을 쳤다.
슬리퍼를 신고 나와 고속버스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엄마가 나를 최초 발견해 잠깐 들른 거라고 이유를 만들었다. 엄마에게 처음으로 말했다. "엄마 나 못살겠어. 엄마 나 죽을 것 같아"
엄마는 한 참을 심란한 얼굴을 하시더니 푹 자라고 했다.
엄마는 내가 자는 동안 남편에게 전화를 했고 남편과 시부모님이 내려오셨다. 나는 다시 시댁으로 돌아갔다.
내가 받은 약속은 6개월 뒤 시댁에서 나와 둘이 살 수 있는 아파트를 마련해 주고 생활비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탈출은 마무리되었고 남편과 계약직 같은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여전히 남편에게 차가웠고
남편으로 그리고 시부모님으로부터 받는 생활비는 오로지 탈출을 위한 자금으로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4.
그렇게 무섭던 할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시더니 3일 만에 돌아가셨다. 잘 모르겠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것인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는 친정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꿈꾸던 독립과 아파트 생활은 산산조각이 나고 친정집 1층에 살게 되었다. 늦게 까지 자고, 다시 복학해 학교를 다니고 밥은 엄마한테 얻어먹고 남편은 학생 신분이었으니 밤이나 되야 들어왔다. 나는 또다시 탈출을 꿈꾸는 그때의 그 자리에 소속만 바뀐 채 돌아와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는데 시간은 지나고 시댁의 2세에 대한 압박은 주신 생활비만큼이나 커졌다.
시아버지의 예리한 시선에 나의 차가운 태도가 걸렸고 나는 한순간 시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되었다.
시댁은 남자에 대한 집착이 큰 집안이었다. 아들이 없으면 그 집안은 저주받았다 생각하는 집안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내 나이에 감당할 수 없었던 시집살이들은 전초전에 불구했다. 나에게는 아들이 필요했다.
다시 계획을 바꿨다. 아들을 낳아주고 돈을 챙겨 도망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얼마나 철없고 어처구니없는 계획이었는지 헛웃음만 나온다. 친정 엄마덕인지 나는 29살 되는 해 세상에 나에게만 허락된듯한 아들을 낳았다. 하늘이 나의 편임을 태양이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이 두 집안 안에서 진정한 승자였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고 홀아버지 밑에서 고생하던 엄마, 시집와서 아들 못나 딸만 셋 낳고 결국 귀남이 하나 얻고 대우받기 시작한 엄마, 7남매 장남에 큰아들 장가보내 5년 만에 큰 손주를 떡하니 맞이하게 된 시아버지. 나는 이 둘 사이에 영웅이자 당분간은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