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터널

1.

by 우산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준서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라야, 분유 어떤 거 사라고 했지?"

준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맨날 사는 거 있잖아."

"까먹었어."

"어떻게 그걸 까먹을 수 있어?" 하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문자로 사진 보내줄게."

"알겠어."

그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생각해 봐도 아들의 분유를 까먹는 게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3일 동안 먹을 음식과 오늘 저녁거리를 고르고, 찬솔이를 차 뒷좌석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3일치라고 해봤자 엄청나게 많은 양은 아니었다. 그들이 찬솔이를 위해 욕심을 조금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 앞 주자창에 차를 세우고 뒷 자석으로 가서 찬솔이를 먼저 유모차에 태우고 장바구니를 오른쪽 어깨에 메고 계단을 올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계단을 5칸 올라가야 했는데 그는 5칸밖에 되지 않는 계단이 오늘은 유독 힘들게 느껴졌다.

때마침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20대 중반정도로 보이는 한 여자가 초점 없는 눈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아파트는 딱 봐도 20년은 거뜬히 넘어 보이는 복도식아파트에 엘리베이터가 한 개뿐이라 집으로 올라가는 시간이 항상 길게 느껴졌다.

그는 그 여자를 보고 이제 막 퇴근을 하고 집으로 열심히 달려오고 있을 하라를 떠올렸다. 하라가 집에 오기 전에 상을 차려 놓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집에 도착한 그는 찬솔이를 안방 작은 침대에 눕혀두고 저녁식사 준비를 하러 갔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장 봐온 것들을 냉장고에 대충 집어넣고 오늘 음식재료만 꺼내서 지금쯤 집으로 오고 있을 하라를 위해 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매일은 아니지만 그는 가끔 하라가 좋아하는 참치를 넣은 김치찌개를 해주곤 했다. 상을 다 차리고 젓가락을 놓고 있을 때 누군가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반갑게 맞이할 준비를 하고 웃으며 말했다.

"어서 와. 얼른 옷 갈아입고 밥 먹어."

"김치찌개 했어?"

하라였다. 하라는 가방을 거실 소파에 내려놓으며 코를 킁킁대며 말했다.

그는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응. 참치도 넣었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라는 방으로 들어가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오늘은 찬솔이가 곤히 잠들어 평온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늘은 어땠어? 힘들진 않았어?"

하라는 곰곰이 오늘하루를 돌이켜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고, 그런 하라를 보며 그는 순간 걱정이 되었다.

"오늘은 괜찮았어."

"아. 다행이네."

그는 안심하며 거실한쪽 벽에 걸려있는 북유럽풍 시계를 확인하고는 입 안에 음식물을 빠르게 씹기 시작했다. 그의 하루는 이제 시작이었다.

번역가로 일을 하고 있는 그는 낮에는 찬솔이를 돌보고, 밤 12시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는 가족들과 여유롭게 식사를 하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푹 쉬고, 방 문으로 들어가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한국말로 적기 시작했다.

그는 일을 하는 동안에는 잡생각이 들지 않았다. 거실에서는 텔레비전 소리와 찬솔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잠시 물 한잔하러 거실로 나가면 세상 서럽게 울고 있는 찬솔이와 그를 안고 있는 하라를 마주쳤다. 아침부터 울음소리를 질리도록 들은 탓인지 그는 머리도 식힐 겸 밖으로 나가 밤공기와 풀내음을 코로 들이마셨다. 선선한 바람과 핑크빛 코스모스가 물든 계절의 공기는 그를 고요한 분위기에 취하게 만들었다. 그는 한껏 취한 상태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일들이 생각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하루하루 외줄 타기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에게 이 순간만큼은 유일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는 한동안 가만히 서서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전쟁터 속으로 들어갔다.

그에게 집은 그리 편안한 공간이 아니었다. 낮에는 육아, 저녁에는 일을 하는 전혀 편안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집에서도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일을 했다.

시간은 흐르고 어느덧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얼른 씻고 이미 잠들어있는 하라의 옆으로 가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 그에게 알 수 없는 말로 속삭이는 소리에 그는 잠에서 깼다. 그가 현실세계로 돌아오자마자 마주한건 나지막이 들리는 하라의 짜증 섞인 목소리와 찬솔이의 애타는 울음소리였다.

"오빠, 찬솔이 좀..."

그는 하라의 말에 울고 있는 찬솔이를 안고, 컴컴한 거실로 나갔다. 그는 비몽사몽 한 상태로 식탁 위에 달린 작은 조명을 켜고, 아무런 존재도 느껴지지 않는 쓸쓸함이 맴도는 집 안을 조용히 돌아다니며 찬솔이를 어르고 달랬다. 하지만 찬솔이의 의문에 울음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는 한참을 달랜 끝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곤히 잠든 찬솔이의 평온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시름 놓은 그는 잠든 찬솔이를 품에 안은 채로 거실 창문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눈에 꺼지지 않은 맞은편 아파트에 환한 불빛들이 보였다. 그는 그 불빛들을 보며 어떤 심오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저 사람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는 걸까.'

그는 이러한 궁금증과 동시에 그들과 하나가 된듯한 느낌이 들었다. 달빛이 비치는 평온하고 잔잔한 바다와도 같은 그들이 아니라 달빛을 가리는 혼란스러운 파도들에 휩쓸려가는 그들과 묶여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찬솔이는 작은 빛조차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를 안고 있는 준서는 밝게 빛났다. 그리고 그는 오늘보다 내일 더 밝게 빛날 것이다.

다음날, 그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무슨 소리야?"

그가 졸린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갔을 때 마주한건 텀블러를 떨어뜨려 어쩔 줄 몰라하는 하라의 모습이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조심 좀 하지."

그는 걸레를 가져와 뜨거운 커피를 닦았다.

"내가 할게. 애 깨기 전에 더 자."

"아니야, 당신 늦은 거 아니야? 얼른 가."

"알겠어. 고마워."

하라는 마지못해 그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고 집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집안은 정적이 흘렀다.

몇 초나 지났을까 잠시 후, 정적을 깨는 찬솔이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그는 닦고 있던 걸레를 싱크대에 올려두고 찬솔이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금방 울음이 그친 찬솔이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그도 다시 침대에 누워 하라의 온기가 남아있는 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또다시 누군가 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는 분명 눈을 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떠봐도 그대로였다. 무엇인가 아직도 꿈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이고 눈을 비비고 다시 떠봐도 온통 검은 배경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