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터널

2.

by 우산

검은 배경 안에 희미하게 보이는 빛은 꿈같은 포근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포근함은 사라지고, 그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암흑 같은 세상 속에서 울려대는 찬솔이의 울음소리에 그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그는 새까맣게 타 한 줌의 재가 되기 전에 서둘러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찬솔이의 우는 소리만을 의지한 채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원목으로 된 작은 침대가 손끝에 닿고, 울고 있는 찬솔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순간 그는 잠시 마음이 놓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찬솔이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의 가냘픈 울음은 더 우렁차게 변해갈 뿐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허기짐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는 낮에도 남는 시간이 있으면 일을 했기 때문에 종종 찬솔이의 분유 시간을 잊어버리곤 했다. 나중에는 더 자주 잊어버리게 되자 20분 간격으로 알람을 맞춰놓았다.

그 알람이 주위를 둘러봐도 어둠뿐인 그에게 한줄기 빛이 돼주었다.

그 덕에 강하게 묶여있던 의문이 풀린 그는 찬솔이를 살며시 내려놓고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딛으면서 부엌으로 향했다.

그는 양팔을 길게 뻗어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부딪히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갈색문까지 도달하는데 한나절이 걸렸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곧이어 하얀 벽지의 미세한 까끌거림이 그의 손끝에 느껴지고, 냉장고에 냉기가 손바닥까지 전해져 오자 그는 조금 더 옆으로 가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더듬거렸다.

그러다 그만 유리컵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바람에 유리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처절하게 깨지는 소리만 들릴뿐 날카로운 가시들이 그의 발목을 잡을 줄은 그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신경 쓰지 않고 검은 도화지에 여러 가지 색채가 담겨있는 환영을 그러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죽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나아간 끝에 그는 익숙한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잡아 조심스럽게 뒷걸음질하는 순간 방금 전 깨뜨린 유리조각을 밟아 날카로운 가시밭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

그는 소름 끼치는 고통에 소리를 질렀다. 길고, 뾰족한 가시는 그의 심장을 찔렸고, 그는 몸을 움직일 수없었다. 움직일수록 가시는 그의 심장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이제 그에게 찬솔이의 울음소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에 불과했다. 그 짧은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살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 차있었다.

그는 살이 뜯겨나가는 고통을 견뎌내며 달팽이처럼 바닥을 기어갔다. 보이지 않는 두려움, 그 두려움에 그는 잠식되어 갔다.

마침내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가시밭을 빠져나와 까끌거리는 벽에 닿을 수 있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벽에 등을 기대는 순간 유리조각들이 살을 파고들어 극심한 고통이 또다시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애벌레가 야금야금 살을 파먹는듯한 고통에 그는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결국 그는 벽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옆으로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새하얀 옷은 이미 시뻘건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의 초점 없는 눈에서 피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그의 빨간 눈물은 더욱 짙어져 붉게 변했다.

그는 한참을 울다 방 한구석에서 또다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끝없는 자의식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줄 누군가의 의식으로 흘러들어 갔다.

온갖 짐승들이 도사리고 있는 이 거대한 숲을 같이 헤쳐나갈 수 있는 강인하고, 믿을 수 있는 단 한 사람, 하라였다. 그녀는 그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강인한 사람이었다.

항상 말 끝마다 '괜찮아, 버틸 만 해.'를 달고 사는 여자였다. 그는 하라의 일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다른 길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하라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는 짐승들에게 사정없이 물어뜯겨 몸이 너덜너덜해진 채 걸었다. 피는 등에서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종아리로 종아리에서 발목으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알람은 계속 울리고 있었고, 그는 그 자명종소리를 따라가 휴대전화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전원버튼을 길게 눌러 하라에게 전화를 했다.-아이폰 인공지능 기능-

“여보세요?”

하라가 말했다.

“하라야, 정말 미안한데, 지금 집으로 와줄 수 있어?”

그는 울먹이며 말했다.

“지금?”

“어...”

“목소리는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게… 사실...”

그는 망설였다. 무섭고, 두려웠다. 자신이 겪은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세상밖으로 꺼내는 순간 이 모든 게 꿈이 아닌 현실이 될 것 같았다.

“뭔데 그래.”

“못 믿을 수도 있는데, 사실 나도 안 믿겨 지금 이 상황이, 모든 게, 그냥 너무 혼란스럽고, 미칠 것 같아.”

“오빠, 일단 진정해 봐.” 하라가 말했다.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봐.”

하라의 말에도 그는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고, 잠시 뒤, 수화기 너머로 그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일단 내가 최대한 빨리 가볼게. 조금만 기다려.”

하라는 그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이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그는 전화가 끊어진 뒤에도 홀로 외로이 흐느꼈다. 절규와 절망이 섞인 두 개의 울음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의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기도 전에 또 다른 두려움이 그를 덮쳐왔다.

그는 마치 자신에게 곧 닥쳐올 일들을 예견한 듯 겁에 질려있었다. 이 끔찍한 장면을 마주한 하라의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얼굴이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난생처음 보는 섬뜩한 그림 속에서 점점 정신을 잃어갔다. 그렇게 그를 붙잡고 있던 마지막 실 줄마저 끊어져 갈 때 누군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빠!”

하라였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기력을 다 써버린 탓에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침묵의 대답에 한번 더 소리쳤지만 이번에는 찬솔이의 울음소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이 말을 끝으로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녹아내리는 만신을 필사적으로 움직여보려 했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그저 침묵 속에서 쓸쓸히 가라앉을 뿐이었다.

그는 눈 녹듯 녹아내려 몸의 반쪽만 남게 되었을 때 어떤 여자가 공포에 젖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차디찬 바닷속에서 맑지만 거친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그가 미치도록 그리워했던 목소리, 인생을 바치기로 모든 만물과 약속한 한 여인의 목소리가 그에게 소리쳤다. 그 순간 그를 감싸고 있던 검은 존재는 사라지고, 밝게 빛나는 존재가 그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간절함이 그를 깨운 것이다. 미칠듯한 고통과 함께 검은 존재들은 미련을 가득 안고, 그에게서 멀

어졌다. 그는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았다. 흐릿하지만 그녀의 그리웠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후, 그의 시간은 폭포수처럼 빠르게 흘렀다.

장엄한 도시를 장식하는 요란한 사이렌소리와 주황색 옷을 입은 여남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그녀의 우수에 찬 눈이 또다시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가 구름 같은 푸근한 들것에 누워 마지막으로 마주한건 어둠이 만들어낸 그의 또 다른 자아였다. 새빨간 핏자국들과 깨진 유리조각들, 그리고 그의 고통의 울부짖음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피로 물든 손바닥자국들. 하지만 모든것들은 그의 환영일 뿐이었다. 피로 물든 환영들이 인간 본성의 악함이 그의 마음 안에서 피어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그는 급히 병원으로 향했고,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근육까지 파고 들어간 유리파편들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는 이 사고로 인해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생겼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 일수도 있는 불행이 그에게 닥쳤다.

그것은 그가 더 이상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지 못하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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