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름에는 진짜 아무도 못 만나겠어.”
내 말이 씨가 된 건지 여름이 다가올 때마다 모두 내 곁을 떠나갔다. 나의 모든 연애는 여름이 오기 전에 끝이 나고 말았다. 날이 뜨거워지는 대신 나는 차갑게 식어갔고 이 지독한 저주를 깨줄 사람이 있을 거라 믿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마음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사람에게 스며들었다. 내가 스며든 건지 그가 스며든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것투성이다. 우리도 그투성이 중 하나이다. 하나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둘인데 하나가 되었다.
나는 더위를 심하게 타는 편으로 여름에 외출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는 일에 금방 싫증이 나고는 한다.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땀방울들, 금방 젖어버리는 옷, 아무리 얇게 입어도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더위, 대중교통에서 진동하는 땀 냄새들, 탈듯한 햇빛. 여름은 싫은 것들 투성이었다. 이러한 여름에 연애를 한다는 건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 때문인 건지 여름이 오기 전마다 이별 통보를 받았고, 현재 이 모든 걸 깨준 사람이 옆에 있다.
우리는 어색하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유빈이 내가 사는 동네로 오기로 해서 집 앞의 카페로 오면 된다고 알려줬다. 그 카페는 내가 연희동에 살기 전부터 양주에서까지 찾아오던 카페였다. 유빈은 처음 오는 동네였기에 조금 늦어 내가 먼저 도착했다. 평일 오후라 웨이팅이 없을 줄 알았으나 이미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다른 카페로 가기로 했지만 그곳의 문도 굳게 닫혀있었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연희동에는 카페가 많다.
우리는 세 번째 카페에서 만날 수 있었다. 혼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노트북을 키고 기다리고 있었다. 과제를 하는 척을 했지만 사실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곧 유빈이 등장했다. 검은 모자를 쓰고 좋아하는 아디다스 옷을 입은 채로. 조용했다. 늦어서 미안하다며 곧 내 앞에 앉았다. 모자에 눈이 가려 보이지 않았다. 나는 유빈의 눈을 보고 싶어서 티 안나게 흘끔거렸다. 유빈은 수줍음이 많은 탓에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하지 못했는데 그러다 한 번씩 눈이 마주칠 때면 심장이 뛰었다. 여름이 오기 직전 봄이었다. 아직 밤에는 조금 쌀쌀했고 낮이면 햇빛이 뜨거웠다. 곧 여름이 오고 있다는 징조였다. 낮에 더움을 느낄 때면 학교에서 땀이 삐질삐질 흐르곤 할 때면 곧 여름이 오니까 불안해지곤 했다. 더울 때의 나는 성공한 적이 없으니까.
유빈의 생일날, 만나서 피자를 먹었다. 이주 만에 만난 우리의 공기는 달라져 있었다. 우리의 관계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생일을 같이 보내는 사이이긴 하지만 아무 사이도 아니기에 어떠한 선물을 해줄지 고민이 됐다. 너무 애매했다. 그래서 서울에 유명한 베이커리 카페를 찾아가 귀여운 케이크 두 개를 사서 갔다. 토끼와 곰돌이가 그려진 케이크였다. 나는 함께 초를 꽂고 소원을 빌고 초를 불고 싶었지만 역시나 수줍음이 많은 유빈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불기 부끄럽다고 했다. 우리는 달달한 케이크를 들고 서로도 모르게 손을 잡고 익선동 길을 걸었다. 유빈은 자꾸만 어두운 곳을 찾았다. 나는 그냥 춥고 막차 시간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유빈은 똥이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냥 리어카가 세워진 옆 돌담에 앉아 말을 했다. “분위기가 좋은 곳에서 말을 하고 싶었는데 못 찾았어. 우리 사귈래?” ‘사귀자.’가 아닌 ‘사귈래?’라는 물음은 유빈다웠다. 나는 고민을 했다. ‘두 번째 만남인데, 너무 이르지 않을까?’ 곧이어 드는 생각은 유빈을 두 번을 만나든 열 번을 만나든 나는 어차피 얘랑 사귀리라는 것이었다. “응!” 내 대답이었고 유빈은 고개를 푹 숙이며 조심스럽게 나를 안았다. 이렇게 우리가 만났다. 처음에 수줍음을 많이 타던 유빈과 나는 온데간데 없고 우리는 영혼의 짝꿍이었다. 우리는 평소에 발을 맞추어 걸을 때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우리의 손은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