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밀가루에는 애환이 담겨 있다
개항장 인천은 우리나라 그 어느 도시보다 ‘밀가루’를 빨리 접했다. 박래품(舶來品)이었다. 선교사들의 짐 보따리나 서양 무역상사의 수입품 목록에 포함되었다. 인천에서 밀가루는 단순히 식량에 그치지 않는다. 단순한 가루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과 산업, 구호와 가난, 도시와 인간의 역사가 뒤엉킨 하얀 흔적이었다. 하얀 가루가 남긴 도시의 기억을 여섯 차례에 걸쳐 따라가 본다. 그 맛은 과연 고소할까, 아니면 씁쓸할까.
글. 유동현 (前 인천시립박물관장)
밀가루 폭탄’ 관련 1936년 9월 20일 조선일보 기사폭탄과 합판이 된 밀가루
하늘에서 밀가루 자루가 쏟아져 내렸다. 정확히 말하면, 비행기에서 지상으로 투하된 것이었다. 1939년, 일제는 미군의 공습에 대비한 방공훈련의 하나로 인천과 경성 등 주요 도시에 이른바 ‘밀가루 폭탄’을 떨어뜨렸다. 훗날 태평양전쟁 말기 하늘을 뒤덮게 될 미군 B-29 폭격기의 공습 상황을 대비한 민간인 대상 훈련이었다. 왜 하필 밀가루였을까.
밀가루 자루는 땅에 닿는 순간 터지며 하얀 가루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 흰 흔적을 ‘불바다가 될 면적’으로 가상해 소방 훈련과 진화 연습을 벌였다. 미군이 사용하는 폭탄 중에 소이탄(燒夷彈)이란 것이 있었다. 이 폭탄은 당시 도시의 건물 대부분이 목조였기에, 한 번 붙은 불은 순식간에 시가지를 집어삼켰다. 일제는 검은 연기를 내뿜는 ‘흑룡 폭탄’, 누런 연기를 내는 ‘황룡 폭탄’이라 부른 가짜 밀가루 폭탄으로 시민들을 동원해 공습 대비 훈련을 반복했다.
밀가루 가짜 폭탄은 또 다른 방식으로 도시의 지형을 바꾸었다. 바로 ‘소개공지(疏開空地)’ 조성이었다. 이는 화재 확산을 막기 위해 시가지 일부를 강제로 비워 방화선을 만드는 정책이었다. 밀가루가 흩어진 범위를 측정해 소이탄의 ‘피해 예상 구역’을 설정하고, 그 안의 주민을 강제 이주시킨 뒤 가옥을 철거해 커다란 공터로 만들었다.
서울의 세운상가는 일제강점기 소개공지로 비워졌던 터 위에 들어선 건축물이다. 인천에서도 동인천역에서 답동사거리로 이어지는 도로(우현로), 지금의 용동마루턱 일대가 대표적인 소개공지였다. 내리(내동)와 용리(용동)의 주거지를 분리한 것이다. 광복 이후 인천시는 이 공터를 도심을 관통하는 간선도로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재민과 빈민들이 그 빈터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아서 공사는 순탄치 않았다. 일부 철거민의 집단 반발도 거셌다. 6·25전쟁을 거친 뒤 1953년 4월 다시 본격적으로 공사에 착수해 1955년 3월 폭 30m, 연장 615m의 도로를 냈다. 오늘날과 같은 모습은 1970년대 초에야 완성되었다. 이 길은 어쩌면 ‘밀가루 폭탄’이 남긴 도시의 상흔 위에 놓인 길이었다.
밀가루는 전쟁 대비 훈련뿐 아니라 산업의 접착제가 되기도 했다. 제분공장에서 밀을 도정하면 밀가루는 일·이·삼등품으로 나뉜다. 일·이등품은 음식점이나 제빵업계, 그리고 라면 공장 등으로 나간다. 문제는 삼등품이다. 이것은 식용으로 사용할 수 없다. 먹을 수 없으니 버려야 하나? 아니다. 공업용으로 사용했다. 이 삼등품 밀가루는 합판 공장에서 얇게 켠 목재를 겹겹이 붙이는 접착제의 주성분이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베니어 합판’은 주택이나 가구의 자재는 물론 피아노와 현악기 제작에도 쓰였다.
인천은 공교롭게도 밀가루 공장 대한제분과 합판 회사 대성목재가 마주 보고 있었다. 대한제분에서 나온 ‘찌꺼기’ 밀가루가 대성목재의 중요한 접착제가 되었다. 6·25전쟁 이후 전후 복구 사업이 활발해지며 건축 자재 수요가 폭증했고, 합판 산업은 호황을 누렸다. 대성목재는 1957년 주한 UN군에 합판을 군납했고, 1966년 제3회 수출의 날에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직원만 3,500여 명에 달해 입사를 위해 줄을 섰고, 당시 서울 상대 출신들도 해외 근무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이 기업을 취업 1순위로 꼽았다. 월급날이면 인천 시내 술집과 음식점이 북적였다.
대성목재는 인천에 3개의 공장이 있었다. 만석동에 1공장이 있었고 월미도에 2공장, 3공장이 있었다. 월미도 매립지에 공장이 들어섰을 때는 최고의 인기가수 김추자가 축하 공연을 펼쳤다.
합판으로 호황을 누린 대성목재는 1963년 인천 국악의 본산인 율목동의 한옥 건물 경아대(景雅臺)를 건립할 때 목재를 제공했고 67년에는 자유공원 광장에 11층으로 된 비둘기집을 제작해 기증했다. 밀가루 접착제가 만든 합판이 도시 문화 공간을 떠받친 셈이다.
대성목재 전경과 동남아에서 수입한 원목들
용동마루턱, 78년“팔거나 다른 물건과 바꾸지 말 것”
6.25 전쟁 후 대한민국은 피폐했다. 무엇보다 국민은 배고팠다. 굶주린 한국을 위해 미국은 밀가루를 보내줬다. 구호품으로 들어온 밀가루 포대에는 성조기를 상징하는 별 4개와 두 손이 굳게 맞잡은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악수표 밀가루’라고 불렀다. 그 포대에는 이런 문구도 적혀 있었다. “미국 국민이 기증한 밀가루로, 팔거나 다른 물건과 바꾸지 말 것”.
‘파랑새’, ‘보리피리’의 시인 한하운은 1949년 12월 30일 밤, 70여 명의 나환자(한센병 환자)들을 이끌고 십정동 부평공동묘지 골짜기로 들어왔다. 그 자신도 한센인이었던 그는 자활 농장을 세우고 아이들을 위해 보육원도 열었다.
그는 71년 나환자 정착사업장인 십정농장 회장 시절 특정범죄가중처벌법위반 및 알선뇌물공여 등 혐의로 구속되었다. 세계구호위원회가 보내준 밀가루와 옥수수를 부정처분한 혐의였다. 밀가루 포대에 새겨진 ‘팔거나 바꾸지 말 것’을 어긴 죄목이었다.
그는 “어떻게 매일 옥수수와 밀가루만 먹느냐”며 보리로 바꾸기 위해 처분했다고 항변했다. 농장 운영과 국유지 불하 문제를 둘러싼 교제비(로비자금) 마련으로 횡령 혐의도 더해졌다. 스무날 가까운 구속 끝에 그는 불구속 기소로 풀려났다. 과거 유명 시인으로 문단에 기여한 공로가 참작되었다.
그는 닭똥을 치우며 천형을 앓던 이웃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다가 1975년 2월 28일 십정동 자택에서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어서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을 우는’ 파랑새가 되었으리라.
1965년 신명보육원 예배 모습 (윗줄 오른쪽 세 번째가 한하운 선생)
60년대, 지금의 청라국제도시를 매립하는 노동자들 모습(출처, ‘봉덕학원 50년사’)밀가루 땀이 배어 있는 청라
고층 빌딩이 즐비한 청라국제도시는 밀가루로 쌓아 올린 도시이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일당으로 밀가루를 배급받은 영세 노역자들이 청라도 인근 공유수면을 메워 오늘의 땅을 만들었다. 훗날 김포매립지라 불렸고, 지금은 청라국제도시로 자리 잡은 그 땅은 미국 국제민간구호단체 ‘케어(CARE)’와 우리나라 정부가 함께 추진한 난민 정착 및 자조근로 사업의 산물이었다.
6·25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서울과 인천 변두리에서 떠돌던 북한 피난민 1천여 명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미(美)공법 480-Ⅱ에 따라 하루 3.6㎏, 한 달 72㎏의 밀가루를 배급받았다. 하루치 3.6㎏ 밀가루는 당시 돈 120원에 해당했다. 현금 대신 밀가루가 품삯이던 그 시절, 노동은 곧 생존이었다.
인부들은 경서동 일대에 천막과 판잣집을 얹어 거처를 삼았다. 변변한 중장비 하나 없이 곡괭이와 삽, 지게와 손수레에 의지해 하루 10여 미터씩 제방을 쌓아나갔다. 그나마 세찬 조류에 밀려 아침에 나가보면 절반 이상이 바다에 쓸려나갔다.
공사 중 사상자가 속출했다. 석산 폭파 때 돌에 맞아 죽거나 떠내려가는 작업선을 붙잡으려다 급물살에 휩쓸려가는 등 17명이 청라도 앞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인부들은 심하게 동요했고 일부는 새 일터를 찾아 인천 시내로 빠져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인천시는 65년부터 3년 동안 매년 700t의 밀가루를, 67년에는 쌀 400t을 지원했다.
당시 영세 노역자들은 율도∼장금도∼문첨도∼청라도∼일도∼장도∼경서동 고잔 등 7개 섬을 이어 6.83㎞ 제방을 만들었다. 그렇게 메워진 면적이 1,296만㎡(약 390만 평)로 오늘날 청라지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 땅은 지난 60년 동안 천해개발공사 간척지, 김포매립지, 동아매립지, 인천경제자유구역 청라지구로 명칭을 바꾸어 왔다. 이름이 무엇이든, 그 아래에는 밀가루 죽과 수제비로 삼시 세끼를 버티며 삽을 들었던 사람들의 피와 땀이 스며 있다.
인천광역시 콘텐츠기획관실에선 <굿모닝인천>, <Incheon Now>, <仁川之窗 인천지창> 세 종류의 매거진을 발행한다. 발행인 유정복 인천광역시장. 8년 연속 대한민국 커뮤니케이션 대상 수상, 창간 15주년의 영문 매거진, 대한민국 최초의 지방정부 중문 매거진. 훌륭한 콘텐츠와 공감의 글을 나누고 싶지만 아직 ‘그게 뭐야?’라는 시민들이 태반이다. 인천이라는 아이템의 보고(寶庫)에서 아껴둔 보물들을 하나 하나 꺼내 알리고 싶다. 가자! 인천시민과 외국인을 위한 열린 소통의 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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