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마을을 만든 이들의 안 괜찮은 이야기
목포에서 5년 버틴 스타트업 '공장공장' 박명호 대표의 솔직 매콤한 인터뷰
✧ 이 인터뷰를 읽고 나면 다음 내용을 알게 됩니다.
-예상치 못한 사업 자금이 필요할 때 대처 방법
-청년마을의 시초인 괜찮아마을을 만들며 겪었던 난관
-비영리 모델로 오해받는 괜찮아마을의 비즈니스 모델 변천사
-인터뷰어가 낚아 올린 작고 소중한 인사이트
심하게 번아웃이 온 적이 있었다. 두 번째 직장을 다닐 때였다. 이유 없이 아팠고 생소한 병명을 진단 받았다. 늘 그랬듯이 일보다는 사람이 힘들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아파할 일이었나 싶기는 한데, 그때는 버틸 에너지가 없었다.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직서를 냈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났다.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다음해의 일이었다.
교토에서 보낸 1년 동안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아르바이트를 했고, 일상을 살았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고, 가끔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서 1인분의 식재료를 샀다. 주말에는 밀린 집안일을 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서서히 내면에 에너지가 채워졌다. 그 에너지가 나를 움직였다. 심야버스를 타고 도쿄에 가서 한 출판사를 찾아갔고, 그 인연을 계기로 국제도서전 스태프로 참여도 했다. 오랜만에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만약 일본에 가기 전, 괜찮아마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쉬어도 괜찮아, 실패해도 괜찮아, 다시 시작해도 괜찮아. 이렇게 말해주는 곳이 그때 있었다면 나는 비행기 타고 교토로 가는 대신 KTX를 타고 목포에 와서 기꺼이 괜찮아마을 주민이 되었을 것이다.
괜찮아마을 참여자들은 주민으로 불린다. 가상의 마을인데 주민으로 부른다니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주민들은 갑갑한 현실에서 벗어나 목포라는 낯선 곳에서 일상을 살아간다. 교토에서 내가 그러했듯이, 그저 밥을 챙겨 먹고, 빨래를 널고, 산책을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조금 괜찮아질 것이다.
‘지친 사람들이 괜찮아지도록 만드는 곳이라니, 너무 멋지잖아?’
멀리서 괜찮아마을을 지켜보며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은 작은 생각이 무럭무럭 자랐고, 나는 결국 괜찮아마을을 만든 공장공장에 입사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괜찮아마을에 대한 수상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막상 괜찮아마을을 만든 사람들은 괜찮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밖에서만 봤을 때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사정이었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왜 좋은 커뮤니티를 만들면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번아웃이 왔을까? 궁금증을 가득 안고 괜찮아마을을 만든 공장공장의 박명호 대표를 인터뷰했다.
*인터뷰어: 김혜원(공장공장 콘텐츠 기획자)
공장공장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괜찮아마을을 빼놓고 말할 수 없겠죠. 사실 공장공장보다 유명하니까요(웃음). 우선 괜찮아마을을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 괜찮아마을은 누구나 쉬어도 괜찮고 실패해도 괜찮은 작은 사회를 지향하는 커뮤니티에요. 이상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세상 어딘가에 이런 데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구상하게 되었어요. 공장공장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 목포에 많이 모였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도 있었죠. 괜찮아마을에서는 누구나 인생을 다시 설계할 수 있고, 비슷한 결을 가진 친구를 만날 수 있어요.
지난번 인터뷰에서 ‘괜찮아마을은 옛 기록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셔서 인상 깊었어요. 어떤 기록이었어요?
▶︎ 이전에 여행 관련 스타트업을 운영하면서 ‘여행하는 골목'을 만들고 싶다고 블로그에 써놓은 적이 있어요. 여행하듯이 머물 수 있는 골목을 만들고 싶었고, 실제로 관련 공간들을 조성하기도 했어요. 결과적으로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에 제주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통째로 빌려서 진행했던 한량유치원*의 다음을 고민할 때, 이때의 기록이 떠올랐어요. 한량유치원 같은 공간들이 모여 마을이 되는 상상을 하게 되었죠. 그렇게 괜찮아마을의 기획이 시작되었어요.
*한량유치원: ‘쉴 줄 아는 한량이 되는 방법을 처음 배우는 공간'이라는 콘셉트로 제주 게스트하우스에서 진행한 여행 프로그램
괜찮아마을은 동업자인 동우 씨와 같이 만들어가셨는데요, 초기 아이디어는 모호하게 마련이라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데 많은 논의와 갈등이 있었을 것 같아요. 합의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 큰 이견이나 갈등은 없었어요. 보통 제가 아이디어 안을 만들어서 설명하고 설득하고 제안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는데요. 많이 대화하고 기록하면서 합의를 이루어갔어요. 제주에서 한량유치원 프로젝트를 마친 뒤 치앙마이에서도 한량유치원을 열어보려고 같이 태국으로 갔었는데요, 그때 정말 많이 이야기하고 방향을 잡아갔어요. 합의했던 이때의 기획을 바탕으로 괜찮아마을을 만들었기 때문에 큰 갈등 없이 진행할 수 있었고요.
괜찮아마을은 시작할 때 자체 사업이 아니라 행정안전부 용역을 통해 진행하셨어요. 혹시 수익화에 대한 부담 때문에 용역을 통해 진행하셨던 걸까요?
▶︎ 그런 건 아니었고요, 처음에 괜찮아마을을 공간 기반 비즈니스로 기획했기 때문에 용역 내용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용역명이 ‘시민주도 공간 활성화 프로젝트'였거든요. 괜찮아마을 기획은 이미 다 만들어두었고 사업계획서도 있으니 한번 내보자 싶었죠. 예산을 활용해서 괜찮아마을을 운영하기 위한 공간을 조성하려고 했어요.
공간 조성비까지 포함된 사업이면 예산이 꽤 컸을 것 같은데요?
▶︎ 부가세 포함해서 6억 6천만 원이었어요.
초기 스타트업이 운영하기에는 꽤 큰 예산인데, 걱정은 안 되셨어요?
▶︎ 예상치 않게 선정됐을 때는 사실 ‘어쩌지'하는 마음이 컸어요. 꽤 무모한 결정이기는 했거든요. 사업 규모는 크고 사업 기간은 짧은데 제안한 내용을 바탕으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한편으로는 그 당시 잘되고 있던 사업의 흐름을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도 고민이 되었어요. 용역에 선정되면 인력을 모두 용역에 투입해야 해서 기존 사업을 아예 접어야 하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원래 하려고 했던 괜찮아마을 사업을 기반으로 제안서를 만들었기 때문에, 어차피 괜찮아마을을 만들 거라면 조금 앞당겨서 해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어요.
공장공장 웹사이트에 있는 다이어리 기록을 보다 보니까 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보증보험 가입부터 난관이 있었더라고요. 이 난관은 어떻게 해결하신 건가요?
▶︎ 공장공장 매출 규모가 아직 크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6억 6천만 원 사업의 보증을 받는다고 하니 서울보증보험에서 난색을 표했어요. 온갖 방법을 찾아보고 사무관님과 소통한 끝에 사업 보증보험은 보증금 5천만 원을 별도로 납부해서 받는 것으로 겨우 합의했어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셨을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그래도 큰 고비를 잘 넘기셨군요?
▶︎ 그런데 그다음도 문제였어요. 사업 자금의 여력이 많이 없어서 사업비 선금을 받아야 했는데요, 역시나 선금 보증보험 발급도 난색을 표하시더라고요. 처음에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하셨지만 오랜 논의 끝에 선금 비율을 낮춰서 받는 것으로 조정했어요.
작은 스타트업에게는 시작부터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사업이었네요.
▶︎ 비용을 마련하는 것도, 기존에 없던 사업에 관해 설명하는 것도, 성실 사업자로서 신뢰를 주는 것도 쉽지 않았죠. 당시에는 몰랐는데 이 정도 난관은 쉬운 편에 속하는 거더라고요(웃음).
좀 아픈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셀 수 없이 많은 난관 중 가장 힘들었던 난관을 소개해주신다면요?
▶︎ 아무래도 예상치 못했던 자부담이 큰 난관이었어요. 빚을 내서 2억 원 가까이 자부담 하게 되었거든요. 공고할 때에는 공간 조성비를 쓸 수 있다고 했는데, 사업을 진행하면서 확인해보니 민간 소유의 공간에 예산을 투입하는 것에 회의적인 의견을 주셨어요. 여러 차례 논의하고 조율하려고 했지만 결국 안 된다는 결론이었죠. 괜찮아마을 운영을 위해서는 당장 한두 달 내로 공간이 필요한데 예산을 쓸 수 없게 되면서 자부담으로 공간을 조성하게 되었어요.
초기 스타트업에게 2억 원의 자금 마련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 준비하셨어요?
▶︎ 가진 자본이 넉넉하지 않아서 대출을 통해서 마련했어요. 괜찮아마을 사업을 자체 진행할 목적으로 기술보증기금 보증에서 담보로 받은 1억 5천만 원, 대표자 개인 대출 5천만 원으로 부담했죠.
예상치 못하게 초반부터 빚을 안고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마음이 좀 어려우셨을 것 같아요.
▶︎ 사실 자부담 때문에 마음이 어렵다기보다는, 공간에 투자했는데 그 결과가 상업적으로 유효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웠어요. 빠르게 진행되는 사업을 위해 급하게 공간 조성에 많은 자금을 투입했지만 장기적으로 공간의 가치를 올리는 투자는 아니었거든요. 결국 나중에 공간을 고치는 데 다시 자금이 투입되었죠.
자부담으로 공간 조성에 많은 돈을 쓰셨는데, 그럼 용역으로 받은 6억 원은 어떻게 사용하셨어요?
▶︎ 예산은 프로젝트 진행비와 인건비로만 사용했어요. 자연스럽게 초반 기획이었던 공간 대신 프로그램 운영에 집중하게 되면서 괜찮아마을의 초기 비즈니스 모델이 만들어졌죠.
자부담 외에 또 어려웠던 점은 없었어요?
▶︎ 괜찮아마을 1, 2기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이 거의 모두 퇴사한 것도 난관이었어요. 사업을 마치고 나니, 기존 직원들은 공동대표인 저와 동우 씨, 그리고 다른 직원 한 명만 남았어요.
여러 명이 연이어 퇴사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닌데,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건가요?
▶︎ 적은 인원으로 큰 예산의 사업을 운영하면서 6개월 안에 성과를 내야 하다 보니 업무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았어요. 매일 정신없이 밀려오는 일을 처리하고 수습했어요. 게다가 괜찮아마을 특성상 사람을 대하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심리적인 자원을 많이 써야 했어요. 사람들 사이의 감정적인 문제나 갈등을 중재해야 했거든요. 숙소에 물이 샌다고 하면 새벽에도 대응해야 했고요. 이런 점이 직원들에게는 부담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만두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괜찮아마을을 만드는 본인들은 괜찮지 않은 상황이었군요. 눈물 나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니 분위기를 좀 바꿔볼까요? 괜찮아마을을 운영하면서 어떤 점이 좋으셨어요?
▶︎ 희미한 확신으로 시작했던 괜찮아마을이 실제로 구현되었다는 점이 좋았어요. 처음에 괜찮아마을을 만들 때 ‘사람들이 진짜 여기까지 올까?’ 걱정스러웠거든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괜찮아마을에 입주하려고 지원서를 내고, 선발 면접에도 엄청 성실하게 임했어요.
괜찮아마을에 들어가려면 면접을 봐야 하나요?
▶︎ 처음에는 행정안전부 용역으로 프로그램을 제공해서 참가비가 무료였고요, 대신 자원과 예산이 제한적이라 신청자 모두를 참여하게 할 수는 없어서 선발하는 방식으로 진행했거든요.
걱정과는 달리 실제로 주민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겠어요.
▶︎ 사람들이 목포까지 찾아와서 괜찮아마을 프로그램을 통해 활동하고, 그중 일부는 목포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좋았죠. 이런 청년들 덕분에 괜찮아마을이라는 청년마을 사례를 보여줄 수 있었고, 이후로 전국에 청년마을이 생겨나면서 지역살이라는 큰 흐름이 만들어졌어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청년마을의 조상님이 되신 거네요.
▶︎ 다른 지역에서 청년마을을 만들어가는 분들이 가끔 저희 자료를 참고했다고 인사를 전해오는데요, 그럴 때 뿌듯하죠. 이런 흐름을 보면서 괜찮아마을이 ‘지역에서 뭘 할 수 있어?’라는 의문에 하나의 답을 제시한 것 같아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나의 답을 선제적으로 제시한 건 좋은데, 선구자가 꼭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니더라고요. 괜찮아마을로 돈 벌고 계신가요?
▶︎ 돈 벌고 있습니다(웃음). ‘돈은 벌고 다니냐', ‘지속 가능성이 있냐' 이런 질문을 진짜 많이 받아왔어요. 괜찮아마을을 비영리 모델로 아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처음에 참가비를 받지 않았다 보니 이런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괜찮아마을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 괜찮아마을은 그동안 쌓아온 역량을 바탕으로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돈을 벌고 있어요. 하나는 지역살이 여행을 판매하는 B2C 모델인데요, 일주일 단위로 짧게 살아보는 ‘주간 괜찮아마을'을 주기적으로 팔고 있어요. 또 다른 하나는 컨설팅이나 교육, 강연 수익을 내는 B2G, B2B 모델이에요. 2022년에 괜찮아마을을 별도 법인으로 분리했는데요, 괜찮아마을을 운영하면서 축적한 노하우를 기반으로 여행과 교육, 컨설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어요.
괜찮아마을로 유명한 공장공장인데 법인을 따로 분리하셨다고요? 혹시… 싸우기라도 하셨어요?
▶︎ 저희가 싸운 건 아니고요(웃음). 공장공장이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괜찮아마을이 잘하는 영역을 더 잘하게 하기 위해서 많은 논의를 거쳐서 자회사로 분리하기로 했어요. 공장공장은 제가, 괜찮아마을목포라는 신규 법인은 동우 씨가 각각 단독 대표를 맡게 되었죠. 동우 씨는 공장공장의 이사로 계속 함께 하고 있고요.
법인도 분리하고 사업 영역을 구분하면서 재정비의 시간을 보내고 있군요. 그럼 정비를 마친 공장공장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까요?
▶︎ 초기에 하려고 했던 일들을 다시 하려고요. 괜찮아마을이라는 큰 프로젝트를 하면서 원래 하려던 일들을 많이 못 했거든요. 기획하고, 콘텐츠 만들고, 홍보하는 일, 이 모든 일을 통합하여 작은 브랜드를 키우고 지원하는 일을 하려고 해요.
큰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 것 같네요.
▶︎ 본격적으로 컴퍼니 빌더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려는 시점이죠. 공장공장 창업 전에 만들었던 여행대학이나 아임웹에서 쌓은 경험과 성과들도 있고, 공장공장 창업 후에 괜찮아마을을 비롯해서 노마드 코워킹스페이스 브랜드 '반짝반짝 1번지', 비건 취향을 다루는 식음료 브랜드인 ‘최소 한끼’, 늘어질 때까지 쉬어가는 스테이 브랜드 ‘카세트플레이어’, 라이프스타일 제품 브랜드 '장래희망은 한량입니다' 같은 브랜드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어요. 결국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고 5년을 버텼으니, 그간 쌓은 시간들이 있어서 덜 실패할 것이라는,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요.
드디어 다음 편이 창업편의 마지막 인터뷰인데요, 괜찮아마을 이외의 공장공장 사업 영역에 대해 들어볼게요. 괜찮아마을만 하면서 먹고살지는 않았을 텐데, 이외에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남았는지 궁금하거든요. 그 과정에서 경험한 뼈아픈 실수나 5년 이상 버틸 수 있었던 이유 같은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좋겠어요. 창업에 참고할 수 있는 실제적인 이야기도 다루어보려고 하니 창업 선배로서 도움될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세요.
‘지역에서 뭘 할 수 있어?’라는 의문에 하나의 답을 제시한 것 같아요.
당장 급한 불을 끄는 것도 좋지만, 기왕이면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결정하자. 나중에 수습하느라 돈과 시간이 더 투입될 수도 있다.
초기에 비즈니스 모델의 명확히 수립되지 않더라도 역량을 쌓다 보면 또 다른 비즈니스의 기회가 된다.
동업했다고 해서 끝까지 함께 갈 필요는 없다. 서로 방향성이 다르다면 분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단, 좋게 헤어져야 협업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므로 싸우지 말자.)
2018년 6월 11일 by.박명호
해내야 하는 월요일이었다.
'공간활성화 프로젝트' 용역 계약서 초안을 받았는데 보증금 6,600만 원을 감당할 수 없었다.
보증보험에 문의를 했는데 여건이 되질 않았다.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착수보고회는 며칠 뒤인 14일(목)이었고 준비를 했다.
좋은 동료를 더 모으려고 연락을 계속 계속 했다.
무엇보다 미루지 않고 동료들과 긴 시간 대화를 했다.
고민을 말했고 동료들은 듣고 이해해줬다. 대화를 했다.
오해를 풀고 해야 할 일을 서로 공유했다.
지난주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어 고민했다.
정신이 없지만 한 편으로는 무언가 하나씩 해내고는 있다는 사실에 작은 안도를 했다.
동료들 덕이다.
다른 사업은 다 접고 공장공장은 5년 버틴 이유는? 5년을 버티면서 가장 뼈아픈 시행착오가 있다?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면서 창업을 해온 이야기와 굳이 지금 소도시에서 창업을 하는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까지. 창업편 마지막 인터뷰에서 모두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