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는 시골로 피난 오셔서도 한의원을 계속하셨다.
내가 중학교 다닐 무렵, 할아버지께서 89세로 돌아가셨다.
운명하실 때 부모님은 우리 형제들이 놀란다고 옆 동네 외갓집으로 보내셨다.
잠시 후 언덕 위에서 ‘□산 ○ 씨, 복! 복! 복!’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곡소리가 났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니 대문 밖 상 위에 쌀 주발과 신발이 놓여있었다.
백부, 백모님들과 부모님들이 모두 곡을 하셨고, 막내 고모님은 너무 우셔서 기절하셨다.
동네 청년들을 뽑아 모자, 수건, 운동화를 사주시고, 새벽부터 산골짜기 동네마다 찾아가서 부고장을 돌리게 했다. 교통편이 없어서였다.
아버지는 곳집에서 상여를 꺼내 손질하셨다. 곳집은 상여와 관련 도구들을 넣어두는 곳인데 아이들은 그곳을 지나다닐 때마다 무서워했다.
집에서는 돼지를 잡는다, 술을 담근다, 상복을 짓는다 하여 장례를 위한 준비로 모두가 바빴다.
그 당시 장례 기간은 3, 5, 7, 9일이었다. 우리 집은 9일장을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꽤 용한 의원이었기에 9일 동안 문상객이 끊임없이 왔다.
문상객들은 곡하고, 절하고, 술상을 받아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고 갔다.
그 일이 9일 동안 계속되니 우리 집은 상갓집이 아니라 동네 잔칫집 같았다.
상여꾼을 뽑아 발인 날 새벽에 상여를 멨다. 아들과 장손자를 그 뒤에 세우고 곡을 하며 30리 밖 장지로 떠났다.
그렇게 장례식은 끝났다.
할아버지 장례는 그 후 70여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 하나를 심어놓았다.
순대.
9일간 돼지를 몇 마리를 잡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돼지 창자와 피로 우리 어머니는 순대를 만들고 가마솥에 삶으셨다.
가마솥뚜껑을 열면 뿌옇고 뜨거운 김이 펄펄 피어올랐다. 어머니는 뜨겁지도 않으신지 금방 삶은 통통한 순대를 자르지 않고 손아귀에 4개를 쥐고 오셔서 우리 형제들에게 한 줄씩 나누어 주셨다. 지금 순대는 맛없는 밥과 당면, 두부를 넣어 만들지만, 그 당시 순대 속은 돼지에서 나온 부산물만 넣었다. 그래서 자르지 않고 그냥 들고 이로 잘라먹으면 너무 맛있어서 할아버지 장례라는 것을 잊게 하였다.
장례 동안 너무 바빠 자식들 챙길 시간도 없으니 자식들 허기질까 걱정되어, 순대를 삶아낼 때마다 제일 먼저 불러 뜨끈하고 김이 오르는 순대를 한 줄씩 입에 물려주시던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갓 삶아낸 진짜 순대의 맛!
그 기억이 가슴을 친다.
장례가 끝난 후 아버지는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곳집을 개조하고 잘 보이지 않게 고쳐놓으셨다.
친정에 가본 지 오래되었다.
곳집은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도 순대를 만들어 먹는 집이 있는지…….
막냇동생이 그곳에 살고 있는데, 예전 같은 장례 풍습은 없어지고, 곳집도 없어졌다고 한다. 요즘 문화 그대로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고, 운구는 장례식장 차로 운행한다고 한다.
그게 맞겠지.
그 옛날 생각을 하는 건 나의 그리움일 뿐이고, 그 당시 9일이라는 장례 기간에 우리 부모님을 비롯한 유족들의 고생은 얼마나 극심했을까? 특히 셋째 며느리임에도 맏며느리 역을 했던 우리 어머니는 얼마나 고달프셨을까?
나이 들고야 깨달았다.
9일장과 어머니의 순대, 지금은 단지 내 기억 속에만 남아 나를 푸근하게 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