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나무

by 사오십년대소녀

어린 시절 시골 뒷산의 도토리나무에 대한 추억이 있다.


6.25 사변으로 충청도 두메산골 외갓집으로 피난 갔다.

그 동네 이름은 ‘붉은 바위’.

옛날에는 그곳 산에 암자가 있었는데, 스님이 바위에 수건을 널어 말린다고 ‘불건바위’였다고 한다.

세월이 ‘붉은 바위’로 바꾸어 놨다고 한다.


외갓집 바로 뒷산인 붉은 바위 산에는 도토리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피난 오기 전에 살던 서울집, 시흥집의 풍경과 ‘붉은 바위’ 산 아래 외갓집의 풍경은 판연히 달랐다.

가을 해 질 무렵 나는 툇마루 끝에 걸터앉아 뒷산 도토리나무들이 바람에 머리 흔드는 모습을 보곤 했다.

어머니가 저녁 짓노라면 굴뚝 연기가 바람에 날리고, 나는 아랫목에 외할머니 베개를 베고 누워 저녁밥 먹는 것도 잊고 잠이 들었다.

'후드득 툭'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투둑 툭툭’

잠결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아침에 방문을 여니 마당에 도토리들이 잔뜩 흩어져있다.

지난밤 문 두드리던 소리는 도토리들이 마당을 두드리던 소리였나 보다.


피난의 시골 생활에는 도토리도 귀한 양식이었다.

나는 바구니를 들고 부지런히 도토리를 주워 담았다.

어머니와 외숙모는 도토리를 까고 갈고 우려서 도토리묵을 만들었다.

이가 없는 외할머니는 잘도 잡수셨다.

나도 한 수저 떠서 입에 집어넣으니 쌉쌀하고 텁텁했다.

수저를 놓고 슬그머니 일어나 뒷산으로 가서 도토리를 주워 산 위로 던졌다.

'안 주울 거야.‘

'안 먹을 거야.'

나무를 두드려 도토리를 털던 돌도 낑낑 들어 멀리 보냈다.

"정말 안 주울 거야!"


지금은 도토리묵을 일부러 사러 다닌다.

나도 외할머니 나이 때가 되어선지 맛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길게 썰어주니 호로록호로록 잘도 먹는다.

그곳에 가본 지 여러 해 지났지만 지금도 도토리나무들이 있다.

도토리 떨어지던 마당에는 농기구와 농사 기계, 승용차들이 서 있고 문화시설도 다양하다.

지금 누가 그곳을 피난지였다고 할 수 있겠나.

이렇게 도토리나무에서 소녀 시절 추억을 회상하니 그리움을 무엇으로 표현해 볼 길이 없다.

소녀는 할머니로 늙었어도, 붉은 바위 뒷산에는 도토리나무들이 옛 정취를 지키며 묵묵히 서 있다.

한때 그곳에 살았던 철없던 소녀가 할머니가 되었어도, 마음에 자수처럼 곱게 새겨져 있음을 나무들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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