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피난 시절 국민학교 2년을 쉬어서 4, 5학년을 다니지 못했다. 그런데도 국민학교 6학년으로 편입되었다.
둘째 외삼촌은 면의 고급 공무원이었는데 차를 타는 게 아니라 담바위 고개를 걸어 넘어 출퇴근하였다.
그래서 큰외삼촌 자녀 둘, 둘째 외삼촌 자녀 둘, 내 동생과 나, 성별로는 여자애 둘, 남자애 네 명이 둘째 외삼촌을 따라 담바위 고개를 넘어 국민학교에 다녔다.
내가 살던 동네 아이들은 산골짜기를 따라 쉬운 길을 걸어 근처에 있는 학교에 등교했다. 우리가 험한 길로 다닌 이유는 고개를 넘어가야 시 소재지 국민학교가 있고, 그 국민학교에 다녀야 부모님이 원하시는 시 소재지 중학교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내 의견은 없고, 그저 부모님 의견에 순종하는 시대였다.
산이 높고 험해서 힘들었지만, 외삼촌 따라다니며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산 정상에는 큰 나무에 알록달록 헝겊 줄, 돌무더기가 있는 서낭당이 있어, 우리는 돌 하나씩 주워 던지고 갔다. 혼자 다닐 때는 으스스해서 빨리 뛰어 내려갔다.
산등성이 옆 좀 떨어진 곳에는 바위굴이 있는데, 문둥이들이 혼자 다니는 아이를 잡아 간을 빼내서 먹는다는 무서운 소문이 있었다. 간혹 그곳에서 연기 날 때가 있는데, 정말 어린애를 잡아 간을 삶아 먹는다고 해서 끔찍했다.
외삼촌은 거지들이 잘 곳이 없어서 그곳에서 밥을 해 먹고 산다고 알려주었다. 그래도 무서웠다.
등성이에 올라서면 그 아래 학교가 보였다.
우리는 내려갈 때 퇴비를 해 가야 하는데, 칡덩굴을 몇 개 잘라 잡아당기면 쉽게 한 덩어리가 되어서 머리나 등에 이고 지고 내려갔다.
운동장에서 조회하는 모습이 산 위에서 보이기도 하는데, 퇴비하다 지각해도 퇴비만 내면 지각이 아니었다. 퇴비를 많이 해 온 날은 상(賞) 자 찍은 공책을 한 권씩 받았다.
집에 갈 때는 상으로 받은 공책은 가방에 넣지 않고 손에 들고 고개를 넘어 뛰어서 집에 갔다, 자랑하려고.
어머니는 상 받아왔다고 간고등어 한 토막씩을 구워주었다.
외사촌 동생들은 시골에서 자라서 산 생활에 재밌는 일을 많이 알았다.
봄이 되면 진달래 따 먹고, 어느 날은 다 먹은 도시락통에 산딸기를 따서 담아왔다. 목화송이나 찔레순은 아삭아삭하고 물기가 많아서 고개 넘느라 갈증이 날 때 먹으면 시원했다.
한 번은 찔레순을 꺾으려 손을 넣었는데 뱀이 똬리를 틀고 있어서 그 후로 찔레나무 근처는 가지 않았다.
남동생들은 소나무에 칼집을 내놓았다. 겨울이 지나면 송진이 굳어서 그것을 뜯어서 쫀드기나무 열매를 발라서 같이 씹으면 솔향 나는 근사한 껌이 되었다. 거기다 크레용을 조금 넣어 씹으면 색깔 고운 껌이 되었다. 그것이 제일 재미있었다.
같은 학교 다니지 않는다고 동네 아이들은 놀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여섯 명이 같이 다녔다. 얼개미 작은 소쿠리 등을 가지고 냇가에 고기 잡으러 갔다. 새뱅이, 징거미, 피라미 등이 잡히는데 난 잡다가 거머리 한 마리만 봐도 질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한 탕기 이상 잡아 오면 어머니께서 찌개를 끓여주셨다. 새뱅이, 징거미를 먹으면 입안이 헐어서 피가 났다.
서울 살 때는 언니와 소꿉놀이만 했는데, 시골에서는 낯설고 야생적인 일들을 겪으니 재미있고 기억에 유달리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