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참 아름다운 나라다.
눈을 들면 늘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주말마다 남편과 작은 세컨드하우스로 향하는 길엔 꼭 한 번쯤 숨이 멎는 듯한 장면이 나타난다. 그렇게 눈부신 풍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느려터진 행정과 제때 열지도 닫지도 않는 상점들, 끝이 안 보이는 공사판과 언제 고쳐질지 모르는 월셋집의 고장 따위는 잠시 잊게 된다.
주말은 일종의 도피처가 된다. 찬란한 자연 속에서 모든 불편과 어긋남이 희미해지고, 나는 그 틈에서 잠깐이나마 리셋된다. 그러곤 다시, 이국의 삶 속으로 돌아온다. 여기가 내 집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납득시키며.
기억을 더듬어보면, 한국의 효율적인 시스템, 빠른 인터넷, 원하는 시간에 열려 있는 상점, 정돈된 거리와 칼같이 맞아떨어지는 약속들 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선 그 체계 안에서 버거웠던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나랑 안 맞아’라고 생각했던 조바심, 불안감, 남들보다 뒤처질 수 없다는 강박이 나를 몰아세웠다. 그러니 그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곳, 내가 조금 느려도 괜찮은 곳을 이상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사실 나는 이곳에서의 삶에 대해 꽤 많은 기대를 품고 있었다. 속도보다는 여유, 성취보다는 균형, 경쟁보다 관계를 중시하는 삶. 나름 이상적인 삶의 형태라고 믿고 싶었다. 아침에 눈뜨면 햇살이 들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눈앞의 해변으로 달려갈 수 있고, 카페에 테라스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그런 장면들.
하지만 막상 이곳에 정착하고 보니, 그 이상은 쉽게 나의 일상이 되지 않았다. 햇살은 좋았지만, 나는 혼자였고, 혼자 돌아다니는 걸 즐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해변은 늘 가까웠지만,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정작 잘 가지 않게 되었다. 여유는 있었지만, 그 여유를 지탱하는 인프라나 질서는 부족해 보였다. 행정은 느리고, 공사는 끝날 줄 몰랐으며, 작은 수리 하나에도 몇 주는 족히 걸렸다. 이상이었던 느긋함은 때로 무기력으로, 기다리던 자유는 고립감으로 변해갔다.
내 이상은 언제나 현실보다 반 발짝 앞에 있는 듯했다. 내가 막 도착했을 땐 조금만 기다리면이라는 말로 그 거리를 좁히려 했다. 언어가 익숙해지면, 집이 안정되면, 친구가 생기면. 하지만 이상은 늘 기다렸다. 조금 더 나아가면 닿을 것 같았고, 그래서인지 매번 도달하지 못한 채 머물렀다.
이상은 그저 가고자 했던 방향이었을 뿐,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아니었다. 어디에 있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더 중요했고, 사소한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여유, 하루하루의 작은 순간들 속에서 느껴지는 행복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바랐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 이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곁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나답게 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은 조금 더 선명해지고, 그 방향은 조금 더 분명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평은 자주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어 풍경을 바라볼 때, 마음 한편이 편안해지는 이유는 아마 내 옆에 있는 사람 덕분일 것이다. 그와 함께 나누는 시간 속에서, 이 모든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 나에게 가장 큰 이상을 선물해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