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의 나, 그리고 페미니즘

by 이음

체구가 작은 아시아인 여성으로서, 이곳에 정착해 살아가고 있다는 건 가끔은 내 존재가 배경보다 더 작게 느껴지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종종 연약하고 만만한 존재로 규정된다. 이것은 단지 내 키나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가져오는 사회적 해석의 문제다. 평화롭게 펼쳐진 스페인의 골목을 걸을 때, 내가 이 풍경 속에서 얼마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지를 먼저 체감한다. 예의 바르고 잘 정돈된 공간 속에서조차, 내가 혼자일 때의 긴장은 은근하다. 낯선 언어 속에서, 익숙하지 않은 시선 속에서, 어떤 날은 자유롭고, 어떤 날은 조용히 움츠러든다.


아시아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이곳에서 때때로 이중 렌즈처럼 작동했다. 어떤 이들은 나의 출신을 듣고 곧장 "그럼 똑똑하겠네"라고 단정한다. 또 어떤 이들은 "조용하고 부지런하겠네"라고 말한다. 대체로 그들은 호의적인 톤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 호의는 언제나 이미 정해진 해석에 기반한다. 그리고 그 뒤에 오는 질문은 대개 "그런데 왜 여기 있어?"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건, 그들에겐 아직도 약간의 불일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이 공간의 기본값이 아니다. 나의 존재는, 설명이 필요하다.


스페인의 어느 도시에서 나는 외국인으로 살아간다. 눈에 띄는 생김새, 그리고 처음 튀어나오는 서툰 스페인어. 이 모든 것이 나를 설명이 필요한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그 설명이 따라오지 않을 때, 사람들은 나를 무례하게 간주하거나, 아주 쉽게 무시한다. 특별히 심한 차별을 겪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피로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 일상 속에서, 나만이 계속 조심하고 있다는 감정은 점점 더 깊이 스며든다.


혼자 길을 걸을 때 나는 이어폰을 한쪽만 꽂고 소리를 최대한 낮춘다. 혹시나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나, 낯선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골목 대신 조명이 밝고 사람 많은 번화가로 우회한다.

갑작스러운 말 걸기, 왁자지껄한 무리와 좁은 인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의 시선들.

어쩌면 나를 향하지 않았을 웃음소리마저, 그 순간에는 전부 내게 닿는다. 모든 것이 감각의 레이더 위에 올라온다.

어떤 날은, 외출 자체를 포기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들이 나를 해친 적은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내 감정을 과장된 것처럼 포장한다.

"아무래도 오버인가?"

"내가 좀 예민하긴 하지."

하지만 곧 이렇게 되묻는다.

실제로 무언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내가 느끼는 공포를 허구로 만들 수 있는가?

때로는 실체 없는 두려움이 더 깊숙이, 더 은밀하게 나를 조여 온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은 위안이 아니라, 오히려 내 감정을 지워버리는 도구가 된다.


이런 감정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괜찮을 거라는 말 뒤에 숨은 위계, 신경 쓰지 말라는 무심한 위로에 나는 종종 상처받는다. 그래서 나는 그 말들을 받아들이기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믿기로 했다. 두려움을 합리화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기로 했다. 내가 겪은 경험의 증거이자, 나만의 방식으로 쌓아온 감각의 기록이니까.

게다가 이곳에서의 나는 단순히 여성이 아니다. 외국인이고, 더 나아가 아시아인이다.

나는 가끔,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인종에 따른 미묘한 위계를 느낀다. 그 이야기는 언젠가 따로 나누고 싶다.

왜냐하면 그건 단지 피부색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교육적 환경이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남편과 함께 외출할 때와 혼자 길을 나설 때의 나는 전혀 다르다. 불안함은 곧장 사라진다. 함께일 때 나는 시선의 표적이 아닌, 한 쌍의 일부가 된다. 존재의 설명을 요하지 않는 편안함 속에, 나는 온전히 즐기는 사람이 된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더 이상 생경한 존재가 되지 않는다. 혼자일 땐 내가 설명해야 했던 모든 것이, 누군가 옆에 있을 때는 자연스레 면제된다. 마치 나라는 존재에 인증 도장이 찍히는 것처럼. 내가 완전히 안전한 게 아니라, 그저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 보호자가 되어주는 셈이다.


차별은 종종 말이 아니라 상황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상황은 언제나 불평등한 구조에서 비롯된다. 보호받는 사람과, 의심받는 사람. 중심에 있는 자와 경계에 있는 자. 나는 자주 후자이다. 왜라는 질문엔 자주 말문이 막힌다. 나에겐 이 상황을 설명할 만한 지식도, 용어도, 논리도 부족하다. 그저 무언가 이상했고, 불편했다. 그 감정을 말로 옮기기 위해 한참을 단어 사이를 헤맨다. 어떤 단어도 정확하지 않고, 어느 표현도 어딘가 모자라다.

분명한 건 차별은 아주 오래된 습관이며, 그 끝은 종종 더 작은 존재를 향한 다는 것이다.


나는 이 구조 안에서 내가 최약체라 여겨지는 걸 체감해 왔다. 그러나 그 감각은 곧, 나보다 더 취약한 존재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거리 위 휠체어 사용자, 점자 없이 헤매는 시각장애인, 계단 앞에서 되돌아서는 노인들. 그리고 장난치는 아이들을 차갑게 바라보는 어른들까지. 우리는 너무 많은 기준이 정상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그 정상이라 불리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문턱이 되기도 한다.

그 문턱은 어느새 습관처럼 굳어져,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 폭력은 말할 수 없고, 선택할 수 없고, 항의할 수도 없는 존재들에게까지 이어진다. 우리가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동물들, 그들 역시 우리의 시야에서 늘 한 걸음쯤 밀려나 있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너무 무거워지진 않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이런 질문을 잠깐 멈춰 서서 묻는 일이,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종류의 상식 아닐까 싶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권력의 구조와, 그 구조 속에서 밀려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어린이와 노인, 비인간 동물까지. 사회의 중심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이들이 겪는 침묵 속의 폭력을 함께 들여다보는 일이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단지 포용이 아니다. 누구든 자기 위치에서 존엄할 수 있어야 한다. 침묵당하지 않고,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서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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