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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강 Jan 02. 2023

사시미 論

광고 크리에이터 교본 29.

일본 말 제목에 너무 노여워하지 마라.

좀 더 싸한 느낌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이 바닥의 초짜라도 한 번은 들어봤음직한 말. Slice of life. 말 그대로 연속성을 가진 일상의 어느 부분을 감자칩 썰듯이, 회를 뜨듯이 슬쩍 베어내어 15초 짧은 광고 안에 담는다는 것인데, 이 슬라이스 오브 라이프의 관건은 리얼리티다.  리얼리티로 파고들어 가자면 또 얘기가 길어지겠지만, 내가 개탄해 마지않는 바는 바로 이 부분이다.  


광어에서 베어낸 회 한 점일지라도 광어 맛이 나야 하는 게 이치인데, 어찌 인생을 잘라낸 슬라이스에서 도무지 인생이라는 맛을 느낄 수 없냐는 거다. 광어 맛은 어디 가고 조리사 손가락의 담배 냄새가 어인 말이냐는 거다. 조작된 시퀀스, 겉도는 대사, 뜬금없는 상품의 개입. 서툰 칼질에 베는 것은 오로지 자기 손가락이다. 판타지나 SF도 그 안에는 자기만의 핍진성이 있는 법이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이라면 그럴법하게 느끼는 개연성이 있을진대, 대한민국 땅에 사는 등장인물 그 누구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 같은 뭔가를 구현해 놓고 slice of life라고 우기지는 말자, 허구적 리얼리티라고 강변하지 말자.

 

인생의 한 단면을 도려낼 때, 그 절단면(slice of life)에는 피가 묻지 않아야 한다. 솜씨 좋은 칼놀림에는 조리사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 작위의 배제와 진정성의 구현이 필수다. 그럴싸한가? 이것이 핍진성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인생'을 함부로 다루다가는 '인생'이 불쌍해지는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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