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강 Jan 20. 2023

야구단 論

광고 크리에이터 교본 43.

가끔 광고대행사가 야구단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역할론에 대해서 한 꼭지 덧붙이자면 광고대행사의 기획 파트는 야구단으로 치면 <프런트>에 가깝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른 의미에서 그라운드에서 흙 묻혀 가며 뛰는 <선수>는 따로 있다는 얘기다. 왜 섭섭한가? 서운해하기 전에 얘기나 한 번 들어보시게나, AE분들.

 

대행사의 사장은 구단주다. 구단주는 우리 야구단이 지향해야 할 꿈과 비전을 제시하면 그걸로 족하다. 예를 들어 <승률보다는 재미 넘치는 야구를!>이라든가 <이틀에 한 번은 꼭 이기는 야구단!>하는 식의 방향 제시 말이다. 그러고 나면 나머지는 구단의 모든 스태프들이 그 장단에 맞춰서 각자 춤을 추면 그만이다. 


단장은 언론이라든가 타구단이라든가 우리 구단의 외부를 담당하면 되고(대행사로 치면 기획 중역쯤 될까), 감독은 재미 넘치는 야구를 위한 선수 기용과 작전을 짜면 되고(CD나 크리에이티브 중역쯤 되겠다), 프런트는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를 관중에게 선사할 수 있도록 선수와 경기의 제반 컨디션을 조성하면 될 것이고. 그런데 뭐가 문제냐고? 


양복 입고 있는 사람들이 자꾸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서고 싶어 하는 병이 도지는 게 문제다. 구단주도 당연히 야구에 관심이 많으실 테니 한마디 하신다. 야, 쟤 좀 빼라 그래, 확 팔아버린다고.  단장님도 뒤질세라 한마디 하신다. 어제 6회에 투수를 왜 안 바꾼 거야? 프런트라고 가만히 있을쏘냐. 오늘은 타순을 좀 바꾸는 게 어떨까, 걔 요새 이상한 얘기 들리던데. 일단 게임이 시작되면 모두의 마음은 그라운드로 간다. 아니 마음만 가는 게 아니라 때로는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내 일 남의 일 잘 알고 있는 고학력의 멀쩡한 사람들이 왜 그럴까. 왜 자꾸 남의 밥그릇에 아무렇잖게 숟가락을 걸칠까? 

 

재미있기 때문이다. 책임 안 지고 훈수 두는 것처럼 재미있는 일이 세상에 또 없기 때문이다. 쉬워 보이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학보에 글 깨나 올려봤으니 까짓 카피 나도 좀 쓸 수 있을 거 같고, 까짓 CM이야 내가 본 영화가 몇 편이고 아는 노래가 몇 곡인데.  광고 크리에이티브가 글 깨우치고 눈귀 뚫려있으면 모두 한 마디씩 건드리는 홍어 거시기라는 거 안다. 알지만 좀 참아 주라. 그냥 애정만 가지고 지켜봐 주라.


CD는 지금 자기 모가지 걸고 작전권을 행사하는 중이시다. 크리에이터들은 자기 모가지를 걸고 치고 달리고 슬라이딩하는 중이시다. 그러니 프런트는 프런트대로 자기 모가지를 걸고 프런트 일에 집중해 주시길 바란다. 본인 모가지를 안 걸어도 되는 크리에이티브 일에 제발 목숨 걸지 말고. 우리가 인정 안 하는 전문성을 광고주가 인정해 주길 바라는가? 지는 게임이나 이기는 게임이나 기록표에 이름 남는 사람들은 오직 <선수>와 <감독>이다. 기록표 바깥에서 자양이 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양복 입고 뛰는 것도 큰 틀에서는 <야구>를 뛰는 일이다.


기우제를 기획하는 것으로 AE는 사명을 다할 수 있다. 그러나 비를 내리게 하지 못하면 크리에이티브는 절단이 난다.  그래서 기획을 <Issue Maker>, 크리에이티브를 <Rain Maker>라 부른다.

작가의 이전글 6 : 6 : 1.5 : 1.5 論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