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와 야수 論>에서 나는 주장했다. 소비자라는 용어를 수첩에서 지우고 그 자리에 대신 <사람>이라는 말을 채워 넣으라고.
이제까지(2012년 쓰고 2023년에 내는 글임을 감안하시길) 소비자는 속을 만큼 속아 왔다. 아니 속일 수 있는 만큼 속일 수 있는 존재라고 믿어져 왔다. 이제까지 마케팅은 돈을 들이면 들인 만큼 <먹어준다>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미지는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만들거나 심지어 조작할 수 있는 것으로 믿어왔다. 그대도 그렇게 믿는가?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사람이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아니다. 미안하다. 두 번 세 번 속기도 하드라. 20223년 현재) 사람들은 기업들의 과대광고와 사기성 짙은 꼼수 마케팅에 번번이 희생양이 되어왔기 때문에 마음에 상처받았다. 업종을 불문하고 많은 마케팅 주장에 냉소하거나 심지어 적대시하게 되었다. (최근 각종 불매 운동을 예로 들어도 그렇다. 그들은 기업이 더 이상 함부로 휘두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더 이상 넋 놓고 지갑을 털어가게 두지 않는다는 얘기다. 어찌해야 하나.
첫째, 윤리적으로 개과천선해야 한다. 있지도 않은 이야기, 실천할 마음도 없는 헛된 약속을 마케팅의 꺼리로 삼기를 포기해야 한다. 이제부터의 모든 마케팅 아이디어는 기업의 실재와 정체성을 근거로 짜여야 한다. 우리의 진실과 사람들의 진심이 만나게 해야 한다. <소비자>는 속아왔지만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속지 않는다. 속여도 되는 상대가 아니다.
둘째, 아이디어의 개념을 수정해야 한다. <소비자>를 상대로 한 아이디어와 <사람>을 대하는 아이디어가 같을 수는 없다. 소비자를 상대로 할 때의 아이디어는 일일이 그들에게 물어 왔다. 조사의 남용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잘 된 조사라도 조사는 과거의 자로 미래를 재는 일에 불과하다.(조사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조사에 갇히지 말라는 충고다. 조사는 어디까지나 어제의 마음에 관한 것이고 어제의 마음을 잘 안다고 해서 모두가 내일의 일까지 잘 알리라는 법은 없다) 일일이 물어서 언제 TV에 걸 것이며, 일건 조사를 잘해놓고도 오독하는 일이 태반이다. 더구나 사람들이 호락호락 제 속내를 보여줄 거 같은가? 마케팅과 크리에이티브의 신약은 임상실험을 거치면 이미 늦는다. 우리가 그들을 쫓아갈 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쫓아오게 만들어야 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아이디어는 기업과 광고대행사가 <penetrating>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살아서 퍼져가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사람들의 관심과 상상력을 <끌어 들일> 때 가능해진다.
오징어 잡이를 할 때 빛을 밝히는 <집어등>을 보라. 어부가 오징어를 향해 헤엄쳐가는가? 집어등은 오징어로 하여금 자신들을 향해 헤엄쳐 오도록 만드는 것이다. 서툰 그물질과 거짓된 작살에 걸릴 <소비자>는 이제 없다. 그저 아이디어의 집어등을 환히 켜고 다가올 <사람>들을 기다리면 될 일이다.
그게 광고식 관계 맺기고 소통이라면 소통이다.(언젠가 '소통'이라는 단어의 오남용에 대해서도 말할 기회가 있겠지. 하여튼 좋은 말은 골라서 망가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