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이가 함께 듣는 좋은 음악
2002년 월드컵으로 전 국민이 열광하던 6월, 나는 고등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친구 박병곤과 함께 사당동 카페와 호프집을 전전하며 새로운 사업에 대해 열심히 의논하고 있었다. 당시 주목받고 있던 내 음악동화 작업을 활용한 상품을 개발해 보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바지 프로덕션”이라는 기획사를 세웠다. 그러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금도 넉넉하지 않았고 동화와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 문제를 풀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우선 나 혼자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생각해 보았다. 가장 쉬운 것이 피아노 솔로 앨범이었다.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 음반. <푸른 자전거> 음반 제작으로 경험도 있었다. <푸른 자전거>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예전에 써놨던 피아노 소품 중에 어린이들이 감상하기에 적당한 것들을 선별한 뒤 전체 컨셉에 맞는 음악을 몇 곡 추가로 작곡하고, 각각의 음악에 적합한 이야기를 만들어 아예 나레이션을 녹음해서 음반에 추가하기로 했다. 나레이션과 피아노 연주가 번갈아 나오는 음반이었다.
가장 빠른 시간에 녹음을 해낼 수 있는 피아니스트로 한봉예 선배를 생각했고, 실제로 단 하루 만에 피아노 소품 30곡을 녹음했다. 나레이션은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목소리가 좋았던 제자 이지혜가 녹음해 주었다. 그렇게 2002년 가을, 이바지 프로덕션은 “엄마와 아이가 함께 듣는 좋은 음악 <즐거운 세상>”을 첫 상품으로 내놓았다. 박병곤은 오랫동안 회사 생활을 경험한 노하우를 살려, 마케팅을 열심히 연구해서 판매처를 다양하게 개발해 내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음반 한 장 내놓은 상황을 감안하면 판매가 잘 되는 편이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회사를 운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대학로에서 음반 발매 기념 콘서트를 이틀 동안 치른 후에 결국 공연 쪽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과는 1997년 창단음악회부터 줄곧 함께 작업했다.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이 일본과의 교류 연주를 한창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서울 공연을 앞두고 합창단원 중 한 분이, 공연 뒤풀이에 일본 기획자가 오니까 내 음악과 관련된 자료를 전해주면 좋겠다는 조언을 해 주셨다. 그렇게 사카모토 유지 씨를 소개 받았고, <즐거운 세상> 음반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나서 사카모토 씨는 일본에서 <즐거운 세상> 음반을 제작해 보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그는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 곡집은 악보를 함께 내놓아야 한다며 일본의 가장 큰 음악출판사 중 하나인 전음악보출판사(全音樂譜出版社; Zen-On Music)를 소개해 주었다. 악보 작업 등 준비하는데 다시 1년 정도 걸렸다. 사카모토 씨는 일본의 큰 음반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회사를 나와서 몇몇 동료들과 독립 레이블을 만들었다. 니폰 어쿠스틱 레코드(NAR; Nippon Acoustic Records INC.)는 당시 회사의 첫 상품으로 10개 정도의 음반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었는데, <즐거운 세상>도 그중 하나였다. 이 회사는 현재, 일본 전통음악, 일본 연주가들의 연주 음반, 일본 및 해외의 현대작곡가들의 작품 등 독특한 레퍼토리의 어쿠스틱 연주 음반을 내놓고 있는 중견 음반회사로 자리 잡았다.
대략 준비가 끝나고 녹음과 계약을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녹음 장소는 도쿠시마라는 지방의 콘서트홀이었는데, 공항에서부터 버스와 기차를 몇 번 갈아타고 가야하는, 말 그대로 시골이었다. 이곳에 있는 콘서트홀이 음향도 좋고, 잘 관리된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있다고 해서 녹음 장소로 결정했다고 하는데, 도착해보니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도시의 공연장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잘 지어진 음악회장이었다.
피아니스트는 타카하시 타카코라는 맑은 얼굴의 여성 피아니스트였는데,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음악가였다. 연주 뿐 아니라 나레이션도 피아니스트가 직접 녹음하기로 했단다. 번역은 악보 출판을 맡은 전음악보출판사에서 진행하여 제공해주었다.
녹음은 음악홀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모니터와 다른 모든 장비를 분장실에 설치하여 진행했는데, 무엇보다 소리를 정말 잘 잡아냈다. “이바지 프로덕션”에서 처음 <즐거운 세상> 음반을 제작할 때는 적당한 녹음실을 찾기도 어려웠고, 가까스로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있다고 섭외한 녹음실은 피아노 상태도 매우 좋지 않았다. 게다가 상당히 노후한 녹음실이어서 소리 만들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그런데 일본은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좋은 음악회장과 피아노가 있고, 대중음악도 아닌 피아노 연주 음반을 전문성 있는 엔지니어들과 녹음할 수 있는 환경을 갖고 있다는 게 부러웠다.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어쿠스틱 음악을 전문적으로 녹음하는 분들이 늘어나긴 했는데, 여전히 제작 환경은 좋은 편이 아니다.
피아니스트의 연주도 좋았고, 나레이션도 피아니스트 스스로 즐거워하며 활발한 톤으로 잘 마무리했다. 사카모토 씨는 일본에서 음반 발매와 악보 출판이 동시에 이루어진 최초의 한국 작곡가의 작품집이라고 응원해 주었다. 음반사에서 통역 겸 옆에서 도와줄 사람으로 한국 유학생 한 분을 섭외해 주었는데, 한국 작곡가가 일본에 와서 멋진 음악 작업하는 걸 보니 자부심이 느껴진다며 좋아했다.
2005년 여름에 음반과 악보가 나왔다. 표지 디자인은, 한국에서 공연하기 위해 제작한 그림을 활용한 것이었는데, 간결한 디자인이지만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영어 제목은 <World Full of Colours>. 몇 년 뒤에 후배 작곡가가 일본 방문했을 때 책방에서 악보집을 보았다며, 한국 작곡가의 악보는 하나 밖에 없었다고 알려주었다.
p.s. 현재 한국과 일본 모두 절판
◆ 아티스트 소개
박병곤: 나와 함께 음악극창작집단 톰방의 공동대표이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서 가장 친하게 되었던 고등학교 친구. 2002년 나와 함께 이바지 프로덕션(현 톰방)을 설립하고 어린이를 위한 음악극을 꾸준히 제작해 왔다.
한봉예: 피아니스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 졸업.1987년 음악대학 동문들이 모여 만들었던 “음악에 모임”에서 처음 알게 된 후, 오랫동안 내 작품을 가리지 않고 기꺼이 연주해 주고 가장 잘 해석해 준 연주자이다. 버팔로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강사를 역임했다. Cameron Baird Solo Comnpetition 우승. 미국에서 “음악모임 <열림>” 활동을 함께 했고, 귀국 후 <즐거운 세상>, <노란우산>, 피아노를 위한 3부작 <멀리 멀리서> 등을 녹음했으며, <Extreme Piano>, <노란우산> 음악회 등 내가 제작한 많은 공연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