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반주 바이올린 독주곡, 대학원 졸업작품
국어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책을 많이 갖고 계셨다. 내가 어릴 적에 우리 식구는 이사를 많이 다녔는데, 이삿짐 한 트럭, 책 한 트럭이 가던 기억이 있다.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아버지 서재에서 우리나라 고전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속에서 내 안에 민족주의적인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클래식 전문 라디오 방송이 시작됐다. 초등학교 때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하던 나는 클래식 음악에 푹 빠졌고, 작곡도 더 열심히 했다.
청소년기 내 음악적 관심사는 국악과 20세기 서양의 현대음악이었다. 클래식 FM 방송 프로그램 중 밤에 작곡과 교수님들이 출연해서 현대음악과 창작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매주 있었는데, 오늘날 작곡되는 서양과 우리나라 작곡가들의 음악들을 소개하기도 하고 한국 작곡가로서의 음악적 정체성을 고민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민족주의가 싹트던 나에게 이런 이야기들은 큰 자극이 되었다. 나는 라디오에서 하루 1시간 정도 나오는 국악 프로그램도 열심히 청취하고 20세기 비조성 음악(a-tonal music)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작곡은 꾸준히 배워나갈 수 있었는데, 국악은 배울 기회를 찾기 어려웠다. 고등학교 때 마침 학교에 좋은 국악반이 있었다. 국악반에 가입신청을 했는데, 음악 선생님께서 합창반 피아노 반주를 하라고 하셨고, 국악반에서는 연락도 안 와서 합창반으로 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원하던 대학 작곡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사춘기부터 마음속에 새겼던, 오늘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현대음악 작곡가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작곡과에 진학했지만, 내 음악적 정체성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본고장 유럽에서도 어렵고 복잡한 무조성음악은 일반적으로 감상되지 않는다. 나는 음악이 청중들과 함께 호흡해야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소년기에 대중가요를 음악 취급도 하지 않았던 나는 대중음악에도 점점 마음을 열었고, 연극, 영화,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 3학년 때, 국악과 학생들이 무료로 풍물 강습을 열었다. 나는 장구를 새로 구입해서 강습에 참여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오래 가지 못했다.
졸업 후 뉴욕대학교(New York University) 대학원에 입학했다. 뉴욕대학교는 자유분방한 분위기였지만, 나는 대학의 작곡과라는 곳이 어디서나 비슷하게 아카데믹한 성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흐름을 벗어나지 않아야 학교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소년기부터 20세기 서양 현대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니, 아카데믹한 음악에 대해 거부감도 없었고, 대신 그런 경향 속에 우리나라의 문화나 정신 등을 잘 조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뉴욕시에 교포들 중심으로 활동하는 “우리문화찾기회”라는 단체에서 풍물 강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또 다시 장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마침 한창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에게 북을 맡겼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열심히 북 연습을 했다. 내가 열심히 북 연습을 하고 있을 당시, 후에 <푸른 자전거>를 기획한 작곡과 친구 마도원이 보스턴에서 유학하고 있었는데, “우리문화찾기회” 사람들과 인연이 닿았던 모양이다. 마도원은 내가 “우리문화찾기회”에서 북을 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동일 같은 사람한테 그런 걸 시키면 어떻게 하냐”며 그만 두게 하라고 얘기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나는 또 장단을 놓게 되었고, 대신 “우리문화찾기회”에서 이민 문화를 반영한 음악회를 몇 차례 만들어 공연했다.
대학원 시절 마지막 작품은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산조를 생각하며(Thinking of Sanjo)>를 구상했다. 국악기를 접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서양악기로 우리 음악 스타일을 자연스럽게 연주하거나, 우리 문화의 어떤 면모를 반영하는 식으로 작품 아이디어를 키워나갔다. <산조를 생각하며>는 내가 존경하는 작곡가 이건용의 <첼로 산조>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데, 나 스스로 국악 공부가 깊지 않은 터에 “바이올린 산조”라고 하기는 자신이 없어서 우회적인 제목을 붙인 것이었다.
이 곡은 내 졸업연주곡 중 하나였다. 나는 뉴욕대학교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7곡을 작곡했다. 지도교수는 완성도 높은 곡을 7곡 작곡한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칭찬을 해 주었다. 나는 졸업연주회에 대학원에서 작곡한 아카데믹한 곡을 대부분 반영해서 어느 정도의 음악적 수준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졸업연주 준비 태도는 최악이었다.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지휘 공부를 하던 후배에게 연주자 섭외를 부탁했고, 좋은 연주자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주도적으로 연주자들을 챙겨야 했으나, 생각이 짧아 연주자들을 방치했고, 그들은 하나 둘 연주를 포기했다. 그리하여 결국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졸업연주회 준비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작품 톤도 일정하지 않았고, 연주 수준도 들쭉날쭉이었지만, 그래도 가까운 음악가들과 함께 했기에 즐겁게 연습해 나갔다.
내 졸업연주 직전에 LA사태가 발생했다. 미국 전역에서 인종주의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다. 서부에서 시작되어 점차 동부로 옮겨 오던 이 분노의 불길은 5월1일 뉴욕에 도달했다. 내 졸업연주가 5월2일이었으니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5월2일 오전에는 시내가 많이 정리되어 졸업연주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관객 동원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내 졸업연주회는 조촐하게 치러졌다.
<산조를 생각하며>는 뉴욕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에 있던 바이올리니스트 박초연 선배가 내 졸업연주회에서 초연해 주었다. 전체 5악장이고, 1악장과 2악장에서 가야금 산조 음형 일부를 인용하기도 했다.
박초연 선배와는 내 졸업연주회 이후 점점 더 가까워져서, 나중에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음악인들을 모아 “음악모임 <열림>”을 함께 만들어 열심히 활동했다.
박초연 선배는 자신의 박사 과정 졸업연주회에서도 이 작품을 연주하기를 원했다. 대신 3악장을 제외시키고, 자신의 즉흥 연주를 삽입하자고 제안해서 동의해 주었다. 선배는 자신의 졸업연주회에서 더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산조를 생각하며>는 이렇게 대학원에서 2차례 연주가 된 후, 나 스스로에게서도 잊혀져 갔다.
“더 하우스 콘서트”로 주목받고 있는 박창수 작곡가는 나의 대학 선배인데, 대학 시절 휴학을 한 뒤 복학해서 나와 2학년을 같이 다녔고, 서로 집에도 오가면서 상당히 가까이 지냈다. 내가 미국 이민 간 뒤로는 만나지 못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 간간이 이런 저런 소식을 들었다. 박창수 선배가 오랜 기간 공을 들여 키운 “더 하우스 콘서트”는 음악계에서 점점 영향력을 발휘하여, 많은 음악가들이 참여하고 싶어 하는 음악회가 될 만큼 유명해져서, 괜히 연락했다가 폐가 될 것 같아 그냥 멀리서 활동을 지켜보았다.
그래도 만날 사람들은 어느 순간 결국 만나게 된다. 박창수 선배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공연 프로그램을 지방 문예회관에 초청해 주기도 했다. 그러다 2016년 가을에 열린 작곡가 시리즈에 나를 포함시켜 주었고, <더 하우스 콘서트> 주최로 내 작곡발표회가 열리게 되었다. 나는 이 음악회에서 내 음악의 여러 가지 면모를 최대한 보여주고자 열의를 다해 준비했다. 제509회 하우스 콘서트로 열린 음악회에서 나는 <푸른 자전거>의 몇 곡과 국악기를 활용한 작품들, 실내악곡들과 함께 <산조를 생각하며>를 다시 올렸다. <산조를 생각하며>가 24년 만에 다시 연주되었다. 난해한 음악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이 다소 걱정되었는데,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심정은이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고, 뜻 밖에 관객들 반응도 상당히 좋았다. 잠자고 있던 작품이 다시 생명을 얻었다. 2020년 개인적으로 준비했던 작곡발표회에서 다시 한번 연주했고, 앞으로도 기회가 생기면 종종 무대에 올려보고자 한다.
마도원: 작곡가, 프로듀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졸업. 나와 가장 가까운 대학 친구이다. New England Conservatory 대학원 졸업 후 Berklee 음대에서 재즈를 공부했다. 피아노 솔로 앨범 <푸른 자전거>, 이건용의 아트팝 <혼자사랑> 등의 프로듀서. 현 동덕여자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 크로스 오버 앙상블 “새바” 음악감독.
이건용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및 총장 역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역임.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역임.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 음악감독. 그 외에도 많은 프로필이 있지만, 민족음악연구회를 통해 인연을 맺은 나의 선생님이이다. 작곡가로서 내 삶의 모범이 되어 주시는 분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 중 한 사람이다.
박초연 바이올리니스트, 현 진주교육대학교 교수. 내가 New York University에서 석사 과정에 있을 때 박사 과정으로 함께 다녔던 대학 선배로, 집이 같은 뉴저지 주에 있기도 했고 마음이 잘 맞아 가장 가깝게 지냈다. 내 작품 중 <산조를 생각하며>, <쾌지나 칭칭> 등 여러 작품을 초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