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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일 Apr 23. 2021

"이태원 살인사건" 영화음악 제작기

2009년 봄, 정성훈 PD로부터 전화가 왔다. “2004 국악축전” 때 처음 만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국악 공연 촬영을 많이 하시는 분이었고, 다큐멘타리 감독, 제작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노란우산>의 류재수 선생님과도 잘 아는 사이였고, 나와 같은 동네 사는 분인데다, 개인적인 또 다른 인연도 겹쳤다. 아드님이 작곡가가 되겠다고 해서 몇 번 만나기도 했는데, 지금은 독일에서 작곡 공부를 하고 있다. 

다큐멘타리를 감독으로도 많이 활동하던 정성훈 PD의 활동 영역 중에 극영화 부분은 홍기선 감독의 작품을 주로 제작해 왔는데, 이 날 전화도 홍기선 감독의 신작 때문이었다. 마포구에서 일어났던 재미교포(주한 미군 가족) 청년들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인데, 감독이 음악을 클래식 느낌으로 하고 싶어 한다고 해서 내게 연락을 해 온 것이다. 그렇게 12년 만에 두 번째 영화음악을 하게 되었다.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은 이태원의 한 햄버거 식당에서 대학생이 칼에 찔려 사망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유력한 용의자 2명은 재미교포 등이었는데, 적어도 둘 중 한 명은 확실한 범인이었으나 두 명 모두 처벌받지 못해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다. 특히 검사의 실수로 출국금지를 연장하지 못해 용의자 중 한 명이 미국으로 도주하면서 더 큰 비난을 받았다. 이 사건은 당시 18세에 불과한 청소년들이 아무 이유 없이 칼로 사람을 아홉 군데나 찔러 살해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안긴데 더해, 10년 이상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용의자들이 법망을 피해 미국으로 도주하여 검찰과 법조계에 대한 불신을 키운 사건이었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었던 사건을 재조명하려는 의도에서 제작된 영화에, 작품의 의미에 공감하는 유명 배우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들었다. 좋은 영화에 많이 출연했던 정진영 씨가 검사 역을 맡았고, 그 당시 특별히 인기가 높았던 장근석 씨가 범인 중 한 명인 패터슨 역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살해당하는 피해자 대학생 역은 아직 유명해기지 전이었던 송중기 씨가 연기했다.  

이 영화에 내가 합류했을 때는 이미 촬영이 많이 진행되어 있었다. 초저예산 영화여서 스타급 배우들도 거의자원봉사 수준으로 참여하고 있었고, 음악 예산도 제작하기 쉽지 않은 정도였는데, 음악이 많이 필요한 영화는 아니었다. 홍기선 감독님은 <이태원 살인사건>이 끔찍하고 어두운 영화지만 음악은 서정적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음악 분량이 많지도 않고 크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영화음악 작업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정말 힘든 작업이었다. 

감독님과 핵심적으로 논의하던 중요한 화장실에서의 살인 장면에서는 강한 느낌이 필요하지 싶어 샘플을 만들어 가면 계속 부드러운 톤의 선율적인 음악을 요구했고, 단순한 선율 위주로 작곡해 가도 감독님의 의도에 맞춰 음악적으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감독님과 또 다른 PD는 살인장면의 음악이 직설적인 방법을 쓰기기보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아름다운 선율이 들렸으면 한다고 주장했고, 나로서는 방법을 찾지 못해 오묘하한 분위기의 첼로 선율 등을 써 갔지만, 감독님은 늘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감독님은 정말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을 웠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아무리 적합한 길을 찾으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절충안을 찾아 음악을 넣어놨는데, 개봉 전에 모니터한 결과 살인장면에서 선율적인 음악은 어울리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결국 두 번 등장하는 살인 장면은 음악 없이 완성되었다. 모니터를 수행했던 PD는 마치 내가 음악 방향을 잘 못 정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내가 제일 처음 제시한 샘플 음악이 선율 없는 음향적인 것이었는데. 톤이 매우 강하긴 했지만. 

   

<이태원 살인사건>의 음악은 전체적으로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등 세 악기로 연주하고, 필요한 부분에 컴퓨터 음악으로 현악합주를 추가해서 전체적으로 클래식 음악의 톤을 기본으로 했다. 작업을 진행하다보니 녹음할 비용까지 도저히 충당이 안 되어서, 제작사에 요청해 예산을 조금 더 늘이기도 했다. 연주는, 이미 나와 많은 작업을 해 오고 있던 아내 신은경이 피아노를 맡았고, 아내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KBS교향악단 단원으로 한 동안 실내악 활동을 같이 했던 바이올리니스트 김희진,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제자였던 첼리스트 서민정이 마침 오스트리아에서 귀국해 있었기에 함께 했다. 

<이태원 살인사건> 영화음악 작업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영화 후반 작업 환경이 대단히 좋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설도 매우 좋았고, 엔지니어들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저예산 독립영화로 출발한 <이태원 살인사건>은 배우 장근석 씨가 출연하게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대형 배급사와 계약이 체결된 것이다. 제작비보다 몇 배 많은 마케팅 비용이 투입되었고, 화제의 영화가 되었다. 관객이 50만 명을 넘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화가 크게 주목받으면서 실제 사건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달라졌다. 재수사에 대한 요구가 빗발쳤고, 영화가 개봉된 지 몇 달 만에 검찰은 법무부에 미국으로 도망한 패터슨에 대한 범죄인 인도 청구를 요청했다. 2011년 패터슨이 미국 내에서 다른 범죄로 체포된 뒤, 한국에서 범죄인 인도 청구를 받은 대상이라는 것이 확인되었고, 미국 내에서 법적 절차를 거쳐, 2015년 패터슨은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2016년부터 아서 패터슨과 공범 에드워드 리는 다시 재판을 받았고, 2017년 대법원에서 패터슨의 20년 형이 확정되었다.    


영화는 스스로 감당해야할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 영화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으로 사건은 재수사되었고, 범인들은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영화 자체로서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개봉 당시 관객들의 평을 살펴보았는데, “상업영화인 줄 알고 봤는데, 독립영화여서 실망했다”는 의견들이 적지 않았다. 영화의 예고편이 엄청난 스릴러 영화인 것처럼 만들어진 탓이었던 것 같다. 애초에 의도했던 대로 독립영화로 개봉해서 꾸준히 지지를 받아 장기간 상영되었더라면, 영화 자체로도 좀 더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음악은 사운드나 전체적인 완성도가 만족스러웠다. 믹싱도 좋았고 과하지 않게 적절한 수준의 영화음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음악 자체만 놓고 보면 또 아쉬움이 남는다. 감독님과 제작진의 의견과 내 생각이 너무 달랐는데, 최종 합의점을 못 찾고 절충을 하다 보니 애매한 지점에서 마무리되었던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음악적으로 전달하려는 핵심은 에필로그부터 엔드 크레딧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음악에 담겨 있다. 제작진이 개봉 전에 모니터한 결과 이 마지막 곡이 너무 감정적이라는 의견이 있었다고 걱정했지만, 이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홍기선 감독님과 나의 의견이 일치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덧없이 살해당한 젊은이를 위한 레퀴엠이었다. 




https://youtu.be/8Sn7giIpKt4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에필로그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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