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이건용 선생님이 서울시오페라단 단장이셨을 때, 창작 오페라 공부 모임을 조직하셨다. 작가와 작곡가들이 매 달 정기적으로 모여 우리말 오페라를 창작 하면서 한국의 오페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 연구해 나가자는 취지였다. 2012년 가을, 4명의 극작가와 4명의 작곡가가 이건용 단장님의 부름을 받고 모였다. 후에 이 모임은 “세종 카메라타”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데, 첫 맴버로 극작가 고연옥, 배삼식, 박춘근, 고재귀, 작곡가 임준희, 신동일, 최우정, 황호준 등이 참여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가장 바쁘고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 작곡가들이었다.
세종 카메라타는 전통적인 오페라 레퍼토리와 참여 멤버들의 이전 작품들을 검토하는 프로그램 등으로 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오페라 창작을 위해 작가와 작곡가 짝을 지었다. 이렇게 구성된 네 팀이 소극장 규모의 신작 오페라를 창작하고, 시연회로 ‘리딩(reading) 공연’을 한 뒤 한 작품을 선정하여 본 공연을 제작한다는 계획이었다.
나와 함께 작업하게 된 분은 박춘근 작가였다. 박춘근 작가는 자신의 연극 <캐스팅>을 오페라로 각색할 것을 제안했고, 나도 좋다고 생각하여 구성을 논의한 뒤에 작업을 시작했다. 박춘근 작가와 내가 또 한 가지 공통으로 생각했던 것은, 대사나 레시타티브로 진행되는 장면은 최소화하고 극 전체를 노래로 진행하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생각과 작업 방향이 비슷했기 때문에 마음이 잘 맞았고, 전체적인 구성에 대한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장면 별로 대본이 나오는 대로 작곡해 나갈 수 있었다. 한 장면이 완성될 때마다 세종카메라타 모임 때 수시로 장면 발표를 해 나갔다.
박춘근 작가는 고심 끝에 작품 제목을 <로미오 대 줄리엣>으로 결정했다. 관객들이 끌릴 만한 좋은 제목이었다.
오페라 <로미오 대 줄리엣>은 오페라로서는 흔치 않은 2인극 오페라다. 이혼 위기의 성악가 부부가 있다. 남자는 젊은 시절 화려하게 데뷔했으나 지금은 별 볼 일 없이 잊혀 가는 오페라 가수인 반면, 여자는 젊은 날 단역을 전전했으나 지금은 프리마돈나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가상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에 함께 주역으로 캐스팅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자 서로 비난하고 다투면서 억지로 연습을 해 나간다. 마침내 공연은 대 성공을 거두었으나, 마지막 공연에서 남자가 지나치게 몰입하여 자신의 연기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정신으로 공연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극장 밖으로 뛰쳐나간다. 공연은 망쳤고, 두 사람은 무대 밖에서 극과 현실을 오가며 다투다가 마침내 화해에 이른다. 연극 <캐스팅>에서 두 주인공은 배우였으나, <로미오 대 줄리엣>에서는 성악가로 바뀌었고, 각 장면들이 효과적으로 각색되었다.
이듬해인 2013년 11월 <세종카메라타 오페라 리딩 공연> 첫 번째 이야기를 앞두고 캐스팅이 완료되었다. 소프라노 최우영과 테너 최상배. ‘리딩 공연’은 조명이나 의상, 세트 등 무대 장치 없이 보면대를 놓고 단순하게 음악회 형식으로 공연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주인공을 맡은 두 사람이 작품에 깊이 몰입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열정에 스탭들도 반응을 해 주었다. 리딩 공연에 올라갈 전체 4 작품의 음악 감독을 맡은 바리톤 장철 감독이 연습마다 자주 와서 조언을 보태주셨고, 전체 진행 연출을 맡은 장재호 감독도 배우들의 열정에 힘을 보태주셔서 소파, 탁자 등 세종문화회관에서 보유하고 있던 설치 가능한 장치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알아봐 주셨다.
결국 오페라 <로미오 대 줄리엣>은 리딩 공연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두 주역들은 대사와 노래를 대부분 외운 상태였고, 연기 호흡까지 맞췄다. 사실 오페라 <로미오 대 줄리엣>은 출연자가 자신의 해석을 반영한 연기 없이 노래만으로 전달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작품이다. 대단히 연극적이어서 음악만으로 완성될 수 없는 작품이었기에, 두 성악가가 자연스럽게 작품 안으로 깊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두 성악가는 특별히 연기력이 뛰어났기에 작품은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세종카메라타 오페라 리딩 공연>은 4일 동안 각 작품마다 2회 씩 공연하게 되었는데, <로미오 대 줄리엣>은 정말 많은 관객이 찾아주셨고,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공연을 했다. 현실을 잘 반영한 대사(가사)들에 공감을 많이 했고, 노래와 음악이 가사와 내용에 적절하게 부합되어 있다는 반응들이었다.
작품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이듬해 <로미오 대 줄리엣>으로 두 번째 오페라 제작을 하게 된다. 마포아트센터와 10월에 공동기획으로 공연을 올리기로 결정되었고, 오패라에 관심이 없었지만 뜻밖에 ‘리딩 공연’을 정말 재미있게 보았다는 “리즈 뮤직”의 이동하 대표와 논의하여 음반 제작도 결정했다. 8월과 9월 동안 녹음과 사진 촬영 등을 진행했고, 무대제작 비용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마련했다. 문제는 여전히 홍보와 관객 동원이었다. 언론홍보를 맡아준 이지연 실장은 언론의 무관심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렇게 홍보가 쉽지 않은 환경에서 관객 동원도 어려운 현실이었지만, 머리를 맞대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놓으면서 열심히 했다.
연출은 이번에도 장수철 선생님이 흔쾌히 맡아주셨다. 2인극을 공연하기에는 무대가 무척 넓어서 전체 무대를 앞뒤로 나누고 현실과 오페라 장면들을 구분하여 충분히 활용하면서 볼거리를 만들었다. 장수철 선생님은 연습 중간에 성악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신동일 작곡가가 음악극을 꾸준히 해 오다보니 경험이 풍부해져서, 이번 작품은 특히 악보에 표기된 다이내믹 표시들이 캐릭터의 호흡을 잘 살릴 수 있도록 작곡되었다. 그러니까 악보 표기를 최대한 반영해서 노래해 주면 좋겠다.”
공연은 이번에도 적자였지만 즐겁고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막을 내렸다. 음악학자 최유준은 “자막 없이 창작오페라의 대사가 관객들에게 충분히 전달되는 것이 놀라웠다”고 전해 주었고, 마포아트센터 담당자들은 “이렇게 좋은 공연을 해 줘서 고맙다”며 지역 문예회관 제작 지원 사업에 마포문화센터와 함께 지원해서 다음해에 다시 공연해 보자고 제안하여, 겨울 동안 준비했으나 지원작에 선정되지 않았다. 그 외 몇몇 다른 지원 사업들에도 개인적으로 지원했었는데, 모두 탈락하여 더 이상 공연을 지속해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몇 년 뒤, 내가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 있었다는 걸 알게 되어, 그런 부분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의심되었다.
<테이크 아웃>과 <로미오 대 줄리엣> 등 두 편의 오페라를 직접 제작하면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공연 제작에 대한 큰 공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가 일반 대중들에게 해 주던 대중적인 종합예술로서의 역할을 이 시대에 다시 살려 재현해 보겠다는 목표를 갖게 된 나는 <로미오 대 줄리엣>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꾸준히 모색하면서 다양한 창작오페라를 시도하고 있다.
박춘근 극작가. 오페라 <로미오 대 줄리엣>과 <검으나 흰 땅>을 함께 작업했고, 그 외에 여러 가지 작업을 함께 해나가고 있다. 뮤지컬 <사비미르>, <야단법석>, 연극 <민들레 바람되어>, <캐스팅>, <안녕, 나의 버터플라이>, <아내의 외출> 등 극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