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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희 Nov 06. 2023

입시장에서 만난 아이의 얼굴

시험을 바쁘게 보러 다녔다. 입시를 시작하면 하루만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긴장감과 압박감 때문에 미래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딱 오늘만 잘 넘기자고 다짐하며 살아갈 뿐이다. 


예술에 급을 메긴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우습다. 사람마다 각자의 스타일이 있는 것이고 각자의 예술관이 있는 것인데 어떻게 평가를 한다는 말인가. 씁쓸한 지점은 시스템에 의문을 품고 있으면서도 보다 쉽게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시스템 앞에 굴복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모순적이게도 나는 입시를 혐오하면서 동시에 좋은 대학교에 가고 싶다. 


최근에 운이 좋게도  2 지망 대학교의 1차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로부터 열흘 뒤에 2차 면접을 보러 갔다. 내 또래로 보이는 혹은 그보다 어려 보이는 학생들이 줄지어 앉아있었다.  그들은 긴장을 삭히려 큰 숨을 내뱉기도,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앳된 얼굴에 서려있는 두려움을 보며 내 표정을 짐작해 보았다. 나도 저렇게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렇다면 정말 자존심 상하는데.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서 여유로운 척 연기를 해 보였다. 잠시 뒤 들어온 교직원은 조금 곤란한 얼굴로 학생들을 훑어보았다.  그분은 정해진 인원보다 모인 인원이 2명이나 더 많다고 말씀하셨다. 대체 누가 잘못 온 걸까. 수험번호를 확인해 보는 눈빛들이 불안정했다. 혹시 시간표를 잘못 본 건 아니겠지. 스스로를 의심하며 재차 확인하는 얼굴들이 안쓰러웠다. 그중 한 명은 다음 시간인데 일찍 왔다며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제는 나머지 한 명이었다. 교직원 분은 유심히 학생명단을 살피시다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불린 여학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로 전 시간에 왔어야 했는데 시간을 헷갈렸던 것이다. 눈앞에서 소중한 기회를 놓친 아이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서러운 눈물을 터뜨렸다.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으며 다른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같은 입시생으로써 그 마음을 누구보다 공감하기에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동시에 저 아이가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서는 경쟁자 한 명이 줄었다고 은근히 기뻐하고 있었을지도. 경쟁을 하는 상황이 오면 자꾸 이기적이게 된다. 다 같이 합격할 수는 없고, 누군가는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이 공존할 수는 없다. 마음의 크기가 콩알만 해지는 순간들을 직면할 때마다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 불쑥 찾아온다. 결정적 순간에 모든 인간들이 이기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면, 이 세상은 아무래도 희망이 없지 않을까. 희망 없는 세상에서 더 가지려고 아등바등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다. 경쟁의 끝에는 허무함과 무기력이 자리하게 된다. 


다 같이 잘 살고 싶다. 아프거나 힘든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의 성공과 행복이 타인의 실패와 불행이 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다. 속 편한 소리 한다며 손가락질해도 된다.  꿈속에나 있는 유토피아라고 놀려도 좋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만 나의 희망만은 짓밟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내 삶의 동력은 세상이 더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서 나온다. 돈과 명예, 개인의 행복과 평화가 넘쳐흐르더라도 그 가능성이 없다면 내 삶은 기력을 잃을지도 모르겠다. 스무 살의 나는 삶의 기력을 다 할까 봐 매일매일 두렵다. 뉴스를 보며, 기사를 보며, 사람들을 보며 실망하고 잃어가는 모든 순간들이 힘겹다. 한 때는 희망과 가능성 같은 아름다운 것들은 어른들이 지켜줄 거라 믿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더 이상 나를 구원해 줄 어른을 기다리지 않는다. 어른들과 아이들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원하는 게 있다면 직접 손에 쥐어야 한다. 빛나는 것들을 얻고 싶다면 내가 직접 손을 뻗어야 한다.  


삶의 기력이 떨어질 때마다 슬픈 사람들을 생각하곤 한다. 돈이 없어서, 아파서, 위험해서, 두려워서, 버거워서 슬픈 사람들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힘이 난다. 빛이 되고 싶어 진다. 차라리 내가 희망이 되고 싶어 진다. 이런 생각들은 오만일까. 치기 어린 패기일까. 뭐가 됐든 잘 살아야겠다. 나의 생각과 주장들에 신빙성이 생기려면  무엇보다 내가 좋은 사람이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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