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당신의 찌푸린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항상 하회탈 같은 푸근한 미소로 나를 맞아 주셨다.
그런 그녀가 응급실의 침대에 누렇게 뜬 얼굴로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누워 있었다.
발을 들여놓기가 망설여졌다. 침대에 가까워질수록 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있다. 마음속에서는 단숨에 달려가야 한다고 외치면서 나는 먼발치에서 멍청히 큰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지난여름 할아버지 제사 때까지만 해도 멀쩡 하시던 분이 췌장암 말기란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느님은 왜 스스로 돕는 사람은 도와주지 않으시고 지랄 맞은 암은 왜 착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나?'
엄마는 항상 말씀하셨다.
"큰 엄마한테 잘해야 한다. 큰 엄마는 엄마 같은 사람이다."
나도 큰어머니는 엄마보다 더 큰 엄마, 훌륭한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지금껏 살아왔다.
국민학교 입학하면서 큰어머니가 계신 고향을 떠나 부모님과 부산에 자리 잡았다.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혼자 고향을 찾았다. 방학 때면 사촌들이 있는 고향에서 방학을 신나게 보내다가 개학 전날 부산으로 돌아오곤 했다.
시골 큰집에는 큰어머니 혼자 사셨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와 평생을 혼자 살다시피 하셨으니 그 인생의 고단함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그래도 억척같은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그 많은 농사며 살림을 혼자서 건사하고 두 자녀까지 출가시키셨다.
할아버지 생전에 받은 효부상이 당신에게 무슨 위안이 되었을까?
방학 때 큰집에 가면 큰어머니가 해주시는 나의 최애 반찬이 두 가지 있다. '골금짠지' 와 '무우지'가 그것이다.
골금짠지는 경상도 사투리로 무말랭이다. 얼음이 얼 정도로 추운 겨울 살얼음이 더덕더덕 붙은 골금짠지를 장독에서 꺼내 더운밥과 먹으면 정말 맛있다.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무말랭이는 그 맛이 안 난다.
또 다른 반찬 무우지는 고추장 단지 깊숙한 곳에 박아둔 무를 꺼내어 썰어 참기름과 참깨를 넣어 무친다.
더운 여름 입맛 없을 때 찬밥을 물에 말아 무우지 반찬이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여름과 겨울 방학 때 큰집에 가면 골금짠지와 무우지는 방학 내내 나의 밥상에서 만날 수 있었다.
고추장에 무를 넣어두면 물이 생겨서 고추장을 버리는 데도 불구하고 큰어머니는 나를 먹이기 위해 해마다 무우지를 만들어 놓으셨다.
어느 해 여름방학에 큰어머니께 미리 말씀도 드리지 않고 집에서 상당한 거리의 저수지로 동네 또래들과 낚시를 간 적이 있다.
고기 잡는 재미에 푹 빠져 저녁 시간도 잊은 채 밤늦게까지 놀다가 돌아왔다.
큰 어머니는 나를 엄청 혼내셨다. 마치 당신 자식같이 혼내셨다. 그때까지 저녁도 안 드시고 나의 무사함을 걱정하고 계셨던 거다.
국민학교 6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부산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나는 약국에 가서 염색약을 샀다.
아마 10통 넘게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성스레 포장하고 주소도 직접 써서 다음날 큰어머니 댁으로 우편으로 보내드렸다. 큰어머니의 흰머리를 염색해 젊게 만들어 드리고 싶었던 걸까?
큰어머니는 너무 고맙다며 시골에 갈 때마다 동네 어른들께
그 일을 떠올리며 자랑하셨다.
큰어머니에게는 유별난 특기(?)가 하나 있었다.
명절날 큰집을 떠날 올 때쯤 항상 인사드리려고 차 창문을 열면 재빠른 게 만 원짜리 몇 장을 차 창안으로 던져 넣으시고는 갑자기 사라지는 마술이 그것이다.
작년 설날 때였다. 작별의 시간이 되어 인사를 드리고 나는 급하게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오늘은 큰 어머니 돈을 안 받았으니 다행이다'이렇게 안도하며 집에 왔다. 조금 있으니 큰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야야, 잘 도착했나? 봉게 비닐에 돈 오만 원 넣었으니 애들 용돈 주라"
코 끝이 찡했다.
큰 어머니의 마술이 진화했다.
그렇게 큰어머니는 석 달을 버티시다 우리 곁을 떠나셨다.
작년 이맘때 장례식을 마치고 큰집 앞을 빠져나오면서 큰어머니를 생각했다.
문득 어디선가 반짝하고 나타나서 차 안으로 재빠르게 종이돈 몇 장을 투척하고 사라져 처마 밑에서 하회탈 웃음을 짓고 계실 것만 같은 큰엄마가 너무 그립고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