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일반했나?"
내가 국민학교 시절 방학 때마다 시골에 갈 때면 외할머니는 이렇게 물어보셨다.
당신께서는 성적을 물어보실 때 '일등'이라는 표현 대신에 꼭 '일반'이라고 하셨다. 나는 '일반'이 아니고 '일등'이 맞다고 몇 번이나 고쳐드렸는데도 외할머니는 끝까지 '일반'을 고집하셨다.
요즘에는 할머니, 외할머니를 잘 구분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할머니 앞에 지역명을 붙여서 '대구 할머니' 또는
'부산 할머니' 이렇게 부른다. 그렇게 부르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외할머니 얘기가 하고 싶은 거다.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의성에서 좀 떨어진 안계면의 고향 동네를 혼자서 다녔다. 외갓집은 안계에서 20리쯤 더 들어 간 외진 곳이었다.
요즘에야 자동차로 한 번에 가지만 그때는 부산에서 기차로 동대구역까지, 동대구역에서 버스를 타고 북부 시외버스정류장으로,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한 시간 넘게 시골길을 달려야 하는 고단한 여정이었다.
12살짜리 꼬맹이가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동생 둘을 데리고 그 먼 거리를 다녔으니 외할머니 말대로 그 당시 나는 꽤나 '총기'있는 어린이였나 보다.
외할머니는 밤늦게까지 호롱불 아래서 홀치기를 하셨다.
밤이나 낮이나 방에 계시는 동안에는 홀치기만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방학 끝나고 돌아오는 날 외할머니가 주머니에 찔러주시던 만 원짜리의 원천은 홀치기 부업이었던 게다.
외할머니는 잠이 오지 않는 다고 하셨다.
평균 수면 시간이 두세 시간 정도로 지독한 불면증이었다.
비전문가인 내가 불면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란 어렵지만 외할머니의 삶을 생각해 보면 알 것도 같다.
젊었을 적 외할아버지는 전국을 떠도는 장돌뱅이였다. 몇 달에 한 번씩 집에 들렀다 떠나는 떠돌이 같은 삶을 사셨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포함해서 4남 2녀를 나아 출가시키셨다. 어려운 살림에도 제일 큰 외삼촌은 대학까지 졸업하셨다.
그 외삼촌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해서 금쪽같은 손주가 태어날 무렵 외할머니는 군대에서 큰외삼촌이 전사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전사통지서를 받았다.
외할머니의 불면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으리라.
긴긴 겨울밤 낮동안 군불로 달구어진 뜨끈한 아랫목에서 외할머니가 챙겨주신 달달한 곶감이며 찰옥수수를 먹으며 할머니의 여우 나는 산골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할머니는 큰아들 이야기를 항상 하셨다. 그렇게 공들여 소중하게 키웠는데 그렇게 떠날지 몰랐다며 세상을 원망하셨다.
그리고 이야기 말미에는 항상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외할머니는 까막 눈이었다.
아니, 까막 눈이 아니었다.
어느 해인가 외갓집에서 노트를 발견했다. 삐뚤빼뚤 쓰여있는 초등학교 공책이 책상 아래 깊숙한 곳에 놓여 있었다.
호기심에 펼쳐 본 노트에는 유행가 가사며, 옛적 할머니들이 신세를 한탄하며 읊조리던 글들이 잔뜩 적혀 있었다.
문법이나 맞춤법은 맞지 않는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적은 외할머니의 글이었다.
외할머니는 그 노트에서 당신 삶의 고단함을 한 글자, 한 글자에 담아 눈물로 적어 내고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는 몇 해 지나 아흔 넘어 까지 장수하시고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불면증이 시작된 건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였다.
병원에 모시고 가서 약도 처방해 드렸는데 몇 번 드시고는 처박아 두시고 그 뒤로 약은 입에도 안 대신다.
올해가 어머니 팔순이다.
어릴 적 찾아뵙던 외갓집 외할머니의 연세랑 얼추 비슷해졌다.
지금은 아무도 없는 시골의 외갓집에 갈 일이 없어졌다.
버스에서 내려 찾아가던 외갓집의 모습이, 사립문 밖에서 나를 떠나보내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뿌옇게 떠오른다.
그리고 호롱불 아래서 홀치기 하면서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시던 외할머니가 오늘 같이 잠 오지 않는 새벽에는 많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