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담 Nov 27. 2021

어머님이라고 불러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남들은 어머님이라고 잘도 부르는 데 나는 끝끝내 입이 떨어지지 않아 어머니 석자로 불러 드리지 못했다.

그렇게 장모님은 우리 가족들과. 이 세상과 이별하셨다.

우리 장모님, 내  아내의 어머니는 그 뜨거운 여름의 열기 속으로 떠나가셨다.


둘째 사위지만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맏사위 대접을  받았다.

장모님은 속세 말로 대찬 분이셨다. 스케일도 크고 매사에 대범하시고 시원시원하게 대장부처럼 이끌어 주셨다.

평생을 집안 어른들을 모시고 가사를 도맡아 오신 분이다.


아내를 만나 첫인사를 갔을 때가 떠오른다

"그냥 여기  들어와서  살게나."

회사 근처에서 자취를 하던 내게 장모님은 통 큰 배려를 해 주셨다.

나는 결혼식 때까지 처가에서  '무전취식'을 했다.

그렇게 나는 처갓집 식구가 되었다.


맞벌이하는 우리 부부를  위해 그 어렵다는 두 아이의 육아도 기꺼이 해 주셨다. 두 딸들이  반듯하고 올곧게 자랄 수 있었던 것도 온전히 장모님의 세심한 돌봄 덕분이다.

그런 장모님의 큰 사랑도 알지 못한 채  한때는 애들을 장모님께 맡기지 않겠다며 오기를 부리고 폐렴 걸린  딸애를 병원에 입원시키는 불상사까지 만들었던 지난 시간이 후회스럽다.


내가 병원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의 순간에도  걱정하지 말라며 김서방은 꼭  건강하게 살아 돌아올 거라며 아내를  안심시키고 비바람 치던 어느 날 아내와 같이 스님을  찾아 나를 살릴 민간 처방을 받으러 가신 분도  우리 장모님 이셨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친 혈육처럼 나를  챙겨 주시던  장모님.

애들이 외할머니라 불러야지 왜 할머니라 부르는 게 어법에 맞지 않다고 억지 주장을 펼쳤던 내가 부끄럽다.


우리 가족은  매주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떠났다.

자연휴양림을 찾아 장모님 표 맛있는 요리를 실컷 맛보고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곤 했다.

여행 숙소가 불편하고 여정이 고단해도 장모님은 이 정도면 괜찮다며 주눅이 든 나를 위로하셨다.


몇  해전 어머니와 장모님을  위해  나훈아 콘서트를 보내  드렸더니 어린아이 마냥 좋아하시던 장모님.

올해 여름 나훈아 앙코르 콘서트를 또 예약했다.

코로나가 한창 심한 시기라 공연의 개최가 불투명했다.

공연 관람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드렸다.

 

" 김서방 , 이번에는 못 가지 싶다"

장모님은 당신이  떠나실 것을 미리 아셨던 것일까?

콘서트 예약을 취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모님이 쓰러 지셨다는 딸아이의 급한 연락을 받았다.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며 마음속으로 절대 돌아가시면 안 된다고 빌고 또 빌었다.

 미동도 않고 누워계신 장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무너져 내렸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 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무엇이 그리 바빠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당신은 그리 떠나셨나요?

당신은 떠나셨지만 우리는 아직도 당신을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디 저 먼 나라에서 모든 근심 걱정 내려놓으시고 편안히 영면하십시오.


어머님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오늘은 당신이 많이 그립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