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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산은 거기 있었다(2)
by
석담
Jan 1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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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하루 전 저녁은 오랜만에 김밥으로 대신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몸이 부대껴서 눈을 뜨니 시간이 자정을 넘긴 12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단번에 뭔가 탈이 났다는 걸 알았다.
배가 빵빵하고 신트림이 났다. 새벽이라 상비약을 구할 방법도 없고 난감했다.
급한 대로 평소 복용하는 약에서 소화제 기능이 있는 약만 골라서 먹어 보기도 했지만 나의 체증은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억지로 눈을 붙이려고 애를 쓰다 눈을 떠보니 새벽 3시였다.
그날 밤은 왜 그리 시간이 더디게 가는지 너무 힘들고 괴로운 밤이었다.
그리고 결전의 날이 밝았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산행을 가야 하는데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몸 상태로 완주가 가능할 건지? 중도에 낙오할 거면 아예 가지 않는 게 맞는 거 아닌지?
나는 나아지지 않는 몸으로 새벽부터 부지런을 떠는 아내를 따라 산행버스를 타기로 한 장소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버스는 정시에 도착했고 우리는 아침식사를 위해 휴게소로 향했다.
휴게소에는 이미 수십 여대의 산행 버스가 정차해 아침식사를 하느라 분주했다.
나는 도저히 아침 식사를 할 수 없었다. 대신에 편의점에서 급하게 부채 모양의 로고가 새겨진 액상 소화제를 사서 먹었다.
고속도로는 안개가 자욱했고 차 유리창에도 습기가 가득 차 바깥 풍경은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출발 시간과 버스 운행 시간을 미루어 대충 도착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할 무렵 버스는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근처에 정차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우리 일행들의 입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탄식이 흘러나왔다.
거기엔 눈이 없었다. 눈꽃 산행이라는 거창한 목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뻘건 황토와 말라 버린 잡초가 우리를 반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끊어질 줄 모르는 산행 대열을 따라 산을 올랐다.
호흡은 목구멍까지 차 올라 숨이 턱턱 막혔고 언제부터인지 이마에는 흥건한 땀이 배어났다.
하늘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 중턱이 지날 무렵에는 쌓인 눈들이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공간에 이르자 일행들은 일제히 아이젠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나도 아내의 도움을 받아 아이젠 착용을 마쳤다.
이번 눈산 산행도 내게는 신선한 첫 경험이었지만 아이젠 착용도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눈산에서 아이젠의 역할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러나 갈수록 무거워지는 아이젠의 무게감은 한 가지를 얻으려면 한 가지는 포기해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을 주었다.
남덕유산 정상에 가까워질 무렵부터 서서히 색다른 세상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고대가 그것이었다.
나는 산행을 하기 전 상고대는 단순히 눈이 내려 생긴 눈꽃이라 단정 짓는 오류를 범했다.
상고대는 서리와 안개와 바람과 눈이 조화를 이루어야 만날 수 있는 자연현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정상 부근에서 시작된 상고대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정상을 얼마 남기지 않은 곳에서 우리는 점식 식사를 했다.
나는 입맛이 없어서 밥을 반이나 남겼다.
세 시간여의 산행 끝에 우리 부부는 남덕유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석 앞에서 기록을 위한 사진 촬영을 마치고 하산길에 올랐다. 우리의 등산 경로는 영각탐방지원센터를 출발해서 정상을 찍고 월성재를 경유해 황점마을로 하산하는 경로였다.
하산길은 두꺼운 눈과 상고대의 연속이었다.
나는 흡사 겨울왕국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고 나니아 연대기의 한 장면 속에 와 있는 듯했다.
일행은 모두 '와'하고 감탄사를 내뱉으면 환상적인 모습에 도취되어 폰카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눈꽃 세상의 경이로움은 새롭게 겨울산에 대한 욕구와 흥분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어깨와 팔목의 통증도, 새끼발가락의 까짐도 잊게 해주는 값진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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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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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며 농사짓는 도시농부입니다. 남는 시간에는 사람의 향기를 찾아 산에 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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